2024. 7. 9. 13:30ㆍ인터뷰
포항공대 17학번의 좌충우돌 창업기
창업 기업은 한 번 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집콕 문화가 확산되면서 게임과 OTT(온라인동영상 서비스) 산업이 급부상했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 게임·애니메이션 제작사는 마냥 웃을 수 없는 상황이다. 물 들어왔으니 노 저어야 하는데 제작 비용과 여건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간 형태의 캐릭터가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구현할 때 5초에 하루가 꼬박 소요된다. 움직임에 따른 관절의 위치와 변화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간편화한 기술도 있지만 이용료가 비싸다.
애니메이션 제작비 절감, 제작 시간 단축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툴이 있다. 인공지능(AI) 기반의 애니메이션 제작 툴 ‘슛’이다. AI가 영상 속 인물의 동작을 인식해 3D 캐릭터에 적용하는 툴로, 테크 스타트업 플라스크가 개발했다. 사업을 정착시키기까지 여러번 아이템과 비즈니스 모델을 바꿨다. 슛을 개발한 이준호, 유재준 공동 창업자를 만났다.
◇세상을 바꾸는 사업가의 꿈
이준호 대표와 유재준 이사는 포항공과대학교(포스텍) 17학번 동갑내기다. 신입생 때 같은 반 동기로 만나 기숙사에서 맥주를 마시며 창업의 꿈을 나누다가 공동 창업의 길을 걷게 됐다. 이 대표는 컴퓨터 공학을, 유 이사는 신소재공학을 전공했다.
(이) “교수였던 아버지가 제가 신입생 때 기술 창업을 하셨어요. 평생 이미지 처리 분야를 연구하시다 AI 기술에 대한 시류 변화를 감지하고 바로 산업 현장에 뛰어드신 거죠. 그 모습에 자극을 받아 대학생활 내내 창업 관련 활동에 몰두했어요. 포스텍 동문 스타트업 인큐베이터(APGC 랩)에서 학생 창업팀 발굴, 창업 대회 주관, 연사 추천 등의 일을 했죠. 자연스레 교내 창업팀이나 투자사와 어울릴 수 있었죠.”
(유) “어릴 적부터 누군가 꿈을 물으면 ‘세상을 바꾸는 사업가가 되겠다’고 말했어요. 제 경우도 화학공학 분야에서 일하는 아버지 영향이 컸어요. 1학년 때는 학업에 열중하다가 2학년 때부터 창업 준비를 했어요. 경영전략 동아리 문을 두드리고 코딩과 인공지능을 공부했죠. APGC 랩을 자주 오가며 이 대표에게 자문을 구한 적도 많았죠.”
물꼬를 튼 건 유 이사 쪽이었다. “교수님의 말씀이 촉매제가 됐어요. 좀 더 준비하고 창업하겠다는 제 말에 ‘그러면 평생 사업 못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오기가 생겨서 저와 뜻이 같은 이 대표에게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죠. 처음에는 창업 보다는 팀플 하는 느낌으로 시작했어요.”
한 번 발을 들여놓으니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방탄소년단 열풍에 영향 받아 ‘K팝 이미지플랫폼’을 구상했어요. 웹사이트에 K팝 관련 이미지를 찾고 공유하는 형태였어요. 그런데 이 아이디어가 국가지원사업에 선정됐어요. 수 천 만원의 돈이 들어오자 정신이 퍼뜩 들더라고요.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임, 애니메이션 회사가 두 청년에게 한 넋두리
2019년 휴학하고 연고지도 없는 서울에 올라와 사무실과 자취방을 구했다. “몇 가지 한계점이 보이더라고요. 연예인 초상권, 사진 저작권 문제 때문에 수익 실현형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지 못할 것 같았어요.”
2019년 8월 AI기반 표정 합성 카메라 앱으로 사업을 전환했다. 사람의 얼굴 사진만 넣어도 표정을 만들어주는 앱이었다. 지금의 스노우, 틱톡 같은 앱과 유사했다. 하지만 이 사업 아이템도 머지 않아 접어야 했다. 악용 우려 때문에 AI 기반 이미지 처리 기술에 대한 법적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였기 때문이었다.
고민에 빠졌을 때 미팅하면서 만난 게임, 애니메이션 업체 사람들의 고충이 떠올랐다. “투자사 주선으로 게임, 애니메이션 업체 분들을 두루 만났어요. 저희의 표정 합성 기술을 접하고는 ‘그림 움직이는 기술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더라고요. 당시엔 사진에 특화된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크게 관련이 없으니 ‘언젠가 만들겠다’고 말했었죠. 그런데 문득 진짜 시장이 요구하는 걸 놓치고 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편한 방향으로 아이템을 선정했던 관성을 버리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영상 속 동작 인식하는 AI 기반 애니메이션 제작 툴 개발
2020년 초, 사업 전환을 결정하고 현직자들의 고충을 들었다. 상황은 심각했다. “인형의 관절을 꺾듯 창작자들은 수작업으로 캐릭터의 동선을 만들어야 해요. 이런 방법이 ‘키프레임’ 편집법인데요, 업계에서는 속된 말로 ‘노가다’라고 부릅니다. 70~100명의 애니메이터가 2년 동안 달라붙어야 90분짜리 영화 한 편이 탄생할 수 있어요. 키프레임보다 진화한 ‘모션 캡처’(센서를 붙인 인간의 동작을 감지해 캐릭터에게 적용하는 기술)의 경우 아주 비싸요. 1분당 제작비가 150만원 가까이하거든요. 대형 게임사나 스튜디오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가격이죠.”
게임 회사에서 근무한 AI 엔지니어를 영입해 기반 기술부터 구축했다. “영상 속에서 인물의 위치를 찾아내는 ‘인간탐지 기술’, 인물의 포즈를 3차원 관절 좌표 형태로 추출하는 3D 포즈 추출 기술, 서로 다른 관절 구조를 가진 인간과 캐릭터 사이에서 포즈 정보를 변환하는 ‘스켈레톤 리타게팅’ 기술을 개발했어요. 이를 위해 1000기가바이트에 달하는 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켰습니다.”
복병은 애니메이션 툴 개발이었다. “3D 애니메이션 툴에서 지원해야 하는 기능의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더군요. 버튼만 1만 가지가 넘는 툴도 있었어요. 수없이 많은 기능 중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추리기 위해 밤새 타사의 툴을 만지면서 기능별 원리를 파악했죠. 웬만한 애니메이터보다 툴 공부를 더 많이 한 것 같아요.”
지난해 말 AI 기반의 애니메이션 영상 툴 ‘슛’의 베타 버전을 출시했다. “웹 기반의 툴로 만들었습니다. 다른 프로그램처럼 내려받거나 설치할 필요가 없죠. 이용 방법은 간단해요. 인물이 움직이는 영상을 슛에 올려요. 그다음 3D 캐릭터 파일을 불러오면 캐릭터가 영상 속 인물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추가 생성된 파일은 기존의 게임, 애니메이션 제작 툴과 호환됩니다. 유튜브에 올릴 수도 있죠.”
손품과 제작 시간 모두 줄였다. “동작을 감지할 때 쓰는 슈트와 센서, 촬영 스튜디오 섭외가 요구되는 모션캡처와는 달리 사람이 움직이는 영상만 있으면 돼요. 작업 시간도 확 줄었죠. 1분 짜리 움직임을 만들고 후보정까지 하는데 키프레임으로 30일, 모션캡처로는 통상 2주가 소요되는데 슛으로 할 경우 4~5일 만에 만들 수 있거든요. 다만 콘텐츠 유형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팅 과정을 자동화해 콘텐츠 제작 생산성을 높였다는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7월 스프링캠프로부터 시드 투자를 받았다. 같은 해 9월에는 네이버의 액셀러레이터 D2 스타트업 팩토리(D2SF)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국내 유수의 게임 회사, 콘텐츠 제작사와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준비 중입니다.”
◇북미 진출 목표...유튜브 다음 타자는 메타버스 플랫폼
운명처럼 뛰어든 창업. 두 청년은 ‘일단 하면 된다’고 입을 모았다.
(이) “좋게 말하면 낙천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모한 성격이에요. 아이디어는 많은데 실행력이 부족한 타입이죠. 학생 때는 시험 이틀 전 까지도 술을 마실 정도였어요. 이런 내가 회사를 이끌 수 있을까 의심했는데, 막상 뛰어들면 하게 돼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성과를 낼 수 없으니 매달려서 하게 되더라고요. 위기와 변화를 거듭할수록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에서 큰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창업하지 않았다면 이런 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유) “과거의 저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학생이었어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허덕이던 자존감 낮은 아이였죠. 창업 후에는 180도 달라졌습니다. 아이디어를 증명하면서 자신감이 붙었거든요. 많은 대학생들이 세무, 회계, 인사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창업 전선에 뛰어들지 못한다고 들었어요. 두려움은 잠깐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나라 스타트업 생태계는 괜찮은 편이거든요. 자신을 믿고 그동안 그려온 걸 한 단계씩 이끌어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10월 정식 버전을 출시할 예정이다.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 전반을 바꾸는 게 목표다.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고 슛을 개발했어요. 3D 콘텐츠 시장의 3분의 1을 북미가 차지하고 있거든요. 중장기적으로는 디즈니, 픽사, EA같은 글로벌 기업을 유저로 확보하고 싶습니다.
슛 같은 3D 애니메이션 제작 툴은 이 시대의 필연이라고 생각해요. 유튜브라는 지배적 플랫폼이 ‘영상 제작’이라는 전문 영역을 대중의 영역으로 끌어왔잖아요. 그 다음 타자는 제페토나 로블록스 같은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가 될 거라 보거든요. 슛이 3D 콘텐츠 제작의 진입장벽을 낮추는데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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