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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유재석 정장 만들었던 디자이너, 실리콘밸리 직장인 변신 위해 한 노력

미대생의 엔지니어 도전기

코로나 사태로 실물 경제가 큰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어느 해보다 힘든 고용상황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어려움 속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취업난을 극복하고 있는 청년들을 통해 희망을 전하는 ‘2030 취업 분투기’를 연재합니다.

폴리텍대 광주캠퍼스 기계설계과에 입학해 반도체 테스트 소켓 글로벌 1위 기업에 취업한 전용(33) 씨. /본인 제공

2016년, 스물아홉의 청년은 4년간 청춘을 바친 의상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작별을 고했다. 기로에 선 그는 갖고 있던 그림이란 재능에 기술을 접목해 보기로 했다. ‘기계 설계’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다시 대학생이 됐다.

늦깎이 대학생으로 대학 문을 밟은 결단은 통했다. 누구보다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한 후 반도체 기능 테스트 소켓 분야의 글로벌 점유율 1위 기업 ‘ISC’에 입사했다. 요즘 꿈의 무대인 실리콘밸리 출장도 앞두고 맘이 설렌다. 미대생 출신 엔지니어 전용(33) 씨의 취업기를 들었다.

◇의상 디자인실에서 마주한 현실

미술대학에서 작업하는 모습. /본인 제공

2008년 조선대학교 섬유디자인과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부터 미술 입시를 준비했고, 희망했던 전공이라 학교생활도 재밌었다. 군 전역 후 25살에 학교 선배의 눈에 띄어 선배가 일하는 의상 디자인실의 막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 첫 사회생활은 어땠나요.

“남성 정장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곳이었어요. 대기업 남성복 브랜드 옷을 OEM(주문자가 요구하는 제품을 대신 생산하는 것) 제작하고, 디자인 대행도 했죠.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년을 근무했습니다. 유재석 씨가 2014년 KBS 연예대상에서 입은 정장을 디자인한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 디자이너를 그만둔 계기는요.

“의복은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 분야라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인력을 선호해요. 평균 정년도 짧죠. 오래 일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재미있었지만, 바쁜 일상이 반복되면서, 오래 할 자신이 없어지더군요. 흔히 말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 전혀 없었거든요. 고객사가 디자인 수정을 요청하는 일이 잦아 주말에 출근하는 일도 다반사였고요.”

디자이너로 근무했던 과거 모습. /본인 제공

- 그래서 어떤 결정을 내렸나요.

“우선 직장을 그만두고, 디자인이란 업까지 관둬도 될지 고민했습니다. 베트남 한 달 살기, 국내 여행 등 우선 하고 싶은 것을 했어요. 대학 졸업 전부터 바로 일을 시작해서 저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거든요. 여행하면서 디자이너란 직업에 대한 미련을 버렸습니다. 정년까지 오래도록 잘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 다시 공부하기로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쉬고 나니까 현실적인 걱정이 들었어요. 당장 뭐라도 배워보자는 생각에 배울 거리를 찾아 나섰죠. 미대에 다닐 때 컴퓨터 디자인과 제품 설계에 대한 수업을 들은 게 도움이 됐습니다. 그때 기계를 설계하는 컴퓨터 모델링 프로그램 캐드와 라이노라는 프로그램을 재밌게 배웠던 기억이 떠올라 3개월짜리 직업 학교에 등록했어요. 배워보니 그림 그리는 일과 비슷한 점이 많았어요. 컴퓨터로 기계를 그려내는 일이니까요. 적성에 맞아서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주변 친구들이 한국폴리텍대학에 입학하면 더 깊이 공부하고 취업도 잘 할 수 있다는 말에 입학을 결심했습니다.”

◇미대생이 코딩 쉽게 배울 수 있었던 비결

폴리텍 대학교에서도 전용씨는 모범생이었다. /본인 제공

2018년 3월 한국폴리텍대학 광주캠퍼스 컴퓨터응용기계설계과(현 기계시스템과)에 입학했다. 컴퓨터응용기계설계과에서는 컴퓨터 설계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기계 설계, 기계공작, 모델링 실습, 정밀 측정, CNC(컴퓨터 공작 기계) 실습 등 현장 실무 위주의 교육을 진행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공부를 했나요.

“컴퓨터 제품 설계 프로그램인 캐드를 기반으로 공장에서 사용하는 금속 기계 설비를 설계하고 정밀하게 가공하는 실습을 많이 했어요. 미술 대학과 이전 직장에서는 추상적인 아름다움에 방점을 맞췄다면, 폴리텍에서는 눈으로 보이는 사물과 정확한 수치를 다뤘죠. 교육 과정이 체계적이라 배우는 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동기들과 엠티 장소에서 촬영한 사진(좌), 라오스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모습(우). /본인 제공

-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자격증이 취업에 도움 된다고 해서 자격증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컴퓨터응용밀링기능사와 기계설계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과에서 1등을 차지한 적도 있죠. 공부 외에 학교생활도 즐겁게 했어요. 과 대표여서 동기들과 자주 어울렸습니다. 폴리텍 기자단으로 활동하며 라오스 봉사 활동을 동행 취재한 적도 있어요. 학교에서 일본의 전자 부품 기업 ‘교세라’ 탐방도 지원해줘서 ‘4년 같은’ 2년을 보냈어요.”

- 정말 바쁘게 보내셨네요.

“동기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다는 점이 가장 큰 동기가 됐어요. 그만큼 절박해졌죠.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라서 외롭진 않았습니다. '고등학생처럼 2년을 지낸다’고 마음먹으니 편하더라고요.  담임선생님같은 교수님께 질문도 자주 하고, 상담도 받으며 그때그때 계획을 세웠어요. 특히 기사 자격증은 문제를 최대한 많이 풀어보는 게 제일 중요한데요. 학교 도서관에서 늦은 저녁까지 동기들과 공부한 기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처음엔 서류에서 줄줄이 낙방

재학 중 2개의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해 총 4개의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본인 제공
전용씨 /본인 제공

2019년 여름방학, 마지막 학기를 준비하며 조기 취업을 결심했다. 200여 곳 가까운 기업에 이력서를 넣었다. 나이나 이전 경력이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컸다.

- 취업 준비 과정이 힘들지 않았나요.

“학교에서 장학금까지 받으며 다녔는데, 초기에 자꾸 낙방하더라고요. 과거에 디자이너로 일했던 경력이 발목 잡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습니다. 예전 경력을 자기소개서에 써보기도 하고 지우기도 해보고 온갖 시도를 다 해봤어요. 탈락을 반복하다 보니 점점 자신감이 떨어졌죠. 하물며 나이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버텼나요.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전공 교수님께 도움을 요청했어요. 교수님이 마음을 다잡아주시고 기업조사도 해주시는 등 도움을 주셔서 버틸 수 있었어요. 학교 수업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폴리텍의 교육과정 자체에 AI(인공지능) 면접이나 자기소개서 작성 등 취업에 직접적으로 도움되는 과목이 포함돼 있거든요. 특히 이력서의 스펙과 적합한 기업을 1:1로 매칭해주는 상담 수업이 제일 큰 도움이 됐어요. 객관적인 분석 결과를 토대로 취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거든요.”

◇과거 이력의 긍정적 부분 강조하는 것이 중요

2019년 ISC에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본인 제공

서진시스템과 ISC와 같은 강소기업에서 연이어 서류 합격을 하며 자신감을 얻었다. 결국 조기 취업에 성공해 2019년 9월 ISC의 엔지니어로 입사하게 됐다.

ISC는 연 매출이 1400억원에 이르는 중견기업이다. 반도체 테스트 솔루션을 공급한다. 국내외 주요 반도체 제조사들이 반도체칩을 출하하기 전 정상 작동하는지 검증하는 테스트 소켓과 보드가 주력 상품이다. 경기 성남 본사를 중심으로 안산, 천안, 미국, 베트남 등에 지사를 두고 있으며 삼성, 하이닉스, 퀄컴, 엔비디아 등 350개 글로벌 반도체 기업에 테스트 소켓을 만들어 납품하고 있다.

- 고생 끝에 합격한 비결은요.

“자소서에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간결하게 쓰되 정직하게 작성해야 하죠. 과장된 내용은 어차피 면접에서 다 드러납니다. 대신 과거의 이력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 공부했던 디자인 관련 지식이 현재 기계설계를 하면서 좀 더 섬세하게 업무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라는 식으로요. 실제로도 그렇고요.”

현 회사에서 근무하는 모습. /본인 제공

-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반도체 테스트 소켓을 반도체에 붙이려면 기구물이 있어야 하는데요. 저는 그 기구물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설계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고객사마다 모두 설계를 달리해야 하죠. 내년 1월에 업무차 미국의 실리콘밸리로 3개월 간 출장을 다녀오는데요. 회사에서 제작한 고객사용 테스트 장비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해당 기업 실무진과 소통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즘 매일 아침을 전화 영어로 시작해요. 실리콘 밸리는 꿈의 종착지 같은 장소잖아요.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실수 없이 프로젝트에 임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에요.”

- 진로 고민에 빠진 이들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드려요.

“주변 친구 중에 진로 문제로 방황하는 친구가 있으면 폴리텍대를 추천해요. 원했던 직업을 가졌음에도 현실과 이상이 달라 만족하지 못했던 삶의 막막함을 벗어나게 해준 곳이니까요. 인생 선배들의 구체적인 ‘마이크로 매니징’ 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폴리텍에서 그런 좋은 교수님들을 만났고, 지원 아래 열심히 했더니 좋은 성과를 얻었습니다. 의지는 있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도전하세요.”

/김영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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