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 줄도 안쓴 학원 교재로 13억원 투자 받은 방법이요?"

더 비비드 2024. 7. 2. 10:31
교재 저작권 구독 플랫폼 '쏠북' 개발기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북아이피스의 윤미선 대표. 교재 저작권 구독 서비스 '쏠북'을 운영하고 있다. /더비비드

2000년대 초 음원 공유 시장을 주도했던 기업 ‘소리바다’가 지난 7일 상장 폐지됐다. 소리바다는 카세트테이프나 CD를 구매해 듣던 음악을 인터넷에서 무료로 공유할 수 있게 해 국내 음악 시장을 석권했다. 하지만 저작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하락길을 걸었다.

학원가는 어떨까. 학원 업계에서 저작권 보호는 아직 먼 나라 이야기다. 전국 보습학원마다 ‘프린트물’이라 불리는 인쇄물이 넘쳐난다. 시험 기간에는 프린트물이 본 교재의 두께보다 두껍다. 학생 수가 많은 대형 학원은 인쇄만 전담하는 아르바이트생을 따로 둘 정도다.

이러한 자료는 저작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존 참고서를 그대로 복사하거나 내용을 짜깁기해 만든 수업 보조 자료이기 때문이다. 업계 관습처럼 퍼진 교재 무단 이용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서비스가 나왔다. 6월 출시 이후 3개월 만에 3억원 넘는 매출을 냈다. 저작권 구독 서비스 ‘쏠북’을 개발한 북아이피스의 윤미선(41) 대표를 만나 에듀테크 창업 이야기를 들었다.

◇교육 업계 연쇄 창업자

쏠북 서비스 화면. 이용료를 지불하고 초중고 영어 내신 교재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쏠북

한 권당 4000원에서 최대 22만원의 이용료를 내면 쏠북 웹사이트 안에서 교재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출판사가 가진 교재 저작권을 개인 강사나 학원이 합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쏠북이 직접 교과서 저작권 이용에 대한 ‘대리 중개권’을 계약해 가능한 일이다. 재산권을 갖고 있는 개인 또는 단체가 대리인에게서 대가를 받고 그 재산권을 사용할 수 있도록 상업적 권리를 부여하는 계약이다. ‘교재 라이선싱 계약’이라고 보면 된다.

쏠북을 이용하면 이용료에 따라 정해진 부수만큼 출력이 가능하다. 화상이나 녹화 수업에서도 화면 공유 기능을 통해 교재를 활용할 수 있다. 한 권당 500만원에서 2000만원 가까이하던 고가의 저작권료를 획기적으로 낮춘 것이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윤 대표. 취미로 교육 커뮤니티를 운영했다. /윤미선 대표 제공

대학에서 일어와 경영학을 전공하고 2006년 ‘팬택’이라는 휴대폰 제조 기업에 입사했다. 해외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다.
일어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퇴근 후 취미로 교육 관련 커뮤니티를 운영했다. “일본어 관련 자료를 만들어 올리던 게 시작이었죠. 회원이 50만명까지 늘어 각종 언어, 컴퓨터 자격시험 정보를 나누는 규모 있는 커뮤니티가 됐어요.”

2008년 다니던 회사를 나와 개인사업자 등록을 마치고 커뮤니티 운영에 집중했다. “당시 성인 교육 분야에서 활성화된 커뮤니티가 제가 알기론 없었어요. 각종 공모전이나 스터디 모임 연결, 일본어 강좌 등을 제공하니 나름 업계에서 인지도가 쌓였죠. 일본어 시험 기출 문제집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클레비 운영 당시 인턴 팀원들과 찍은 사진. /윤미선 대표 제공

2014년에는 새로운 아이템으로 다시 창업했다. “에듀테크 스타트업을 설립해 유명 강사가 아니어도 누구나 편하게 인터넷 녹화 강의를 찍을 수 있는 서비스 ‘아카데미 클라우드’를 제공했어요. 수능 교육만큼 수요가 크진 않지만 성인 취미 교육 강의도 듣고 싶다는 커뮤니티 회원들의 의견에서 착안했죠.”

비즈니스 모델을 인정받아 에스티유니타스라는 교육 서비스 기업에 인수 합병 형태로 엑싯(Exit, 투자금 회수)했다. “피인수 후 2017년 전 직원 4명과 함께 에스티유니타스의 신사업 기획팀으로 들어갔어요. 일종의 재능 인수가 된 거죠. 운영하던 서비스에 초중고 내신 교육을 접목할 계획이었습니다.”

◇수면 위로 올라온 교재 저작권 문제

클레비 운영 당시 서비스를 소개하던 모습. /윤미선 대표 제공

서비스를 입시 교육에 접목하려니 문제가 생겼다. “몇몇 강사들이 ‘아카데미 클라우드에서 강의를 찍으면 저작권 문제가 해결되냐’고 묻더군요. 이전에는 일본어, 디자인 툴과 같은 소규모 특수 과목만 촬영하다 보니 자체 교재나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기출문제로 충분했죠. 내신 강의를 찍으려면 유명 출판사의 교재를 써야 하는데, 교재마다 출판사에 허락받아야 하는 구조더군요.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니 학원 강사들이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렵더라고요.”

영리 목적으로 교재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저작권자의 허가가 기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대면 수업에서는 무단으로 이용했다. “교사 입장에선 교재의 2~3장 분량만 수업에 활용하고 싶은데 모든 학생에게 교재를 사게끔 할 수 없잖아요. 출판사에선 학원이 핵심 고객이기 때문에 제재가 어려워요. 출판사가 일일이 학원에 방문해 확인할 길이 없으니 눈감아줬던 거죠.”

비대면 수업으로 교육 시장이 급변하는 것을 체감하고 독립해 북아이피스를 창업했다. /윤미선 대표 제공

코로나19가 퍼지면서 대부분의 학원이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게 됐다. 고질적인 저작권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실시간 화상 수업이나 녹화강의는 교재 파일을 복제하고 전송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저작권료를 내야 합니다. 교재 한 권당 500만원에서 2000만원 수준이죠. 대형 프랜차이즈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 업체는 이 비용을 부담하며 운영했지만, 코로나19로 불가피하게 화상 수업을 진행하는 소형 학원은 부담하기 어려운 금액이었어요.”

◇교재 저작권 문제에 올인(all-in)해 세 번째 창업

비대면 교육시장이 성장하려면 교재 저작권 문제가 선결돼야 했다. 2020년 독립해 북아이피스를 차렸다. 저작권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통제된 환경 안에서 교재를 활용하는 방안을 떠올렸어요. 강사는 비용 부담을 줄이면서 합법적으로 교재를 활용하고, 출판사는 부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죠.”

EBS 출판사에 방문한 쏠북 운영팀. /윤미선 대표 제공

출판사를 먼저 설득해야 했다. 이 일만 1년 넘게 걸렸다. “출판사는 기본적으로 교재 파일을 인터넷에 유통하는 것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어요. 한번 불법적인 경로로 배포되면 소비자가 출판된 교재를 안 살 거로 생각하니까요. 여러 출판사 관계자를 만나며 교재의 온라인 유통이 출판 시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 보완재로 사용된다는 점, 교재를 못 쓰도록 통제하는 것이 불법적 사용을 더 늘릴 거라는 점을 강조했어요. 그리고 DRM(디지털콘텐츠 저작권 보호 기술)을 활용해 교재가 제한된 환경에서만 사용될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을 구축할 것을 약속했죠.”

설득 끝에 2021년 10월, 지학사, YBM, NE능률 출판사의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 11권으로 시범 서비스를 출시했다. “서비스 검증이 필요했어요. 사용자 입장에선 안 하던 지출을 한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이용자들이 정말 이 서비스를 사용할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죠.”

지난해 10월 시범 서비스를 시작하고 기능을 보완해 올해 6월 공식 출시했다. /더비비드, 쏠북

11권의 교재로 한 달 만에 수백만원의 수익이 났다. 교재를 활용해 2차 저작물을 만들던 강사의 대기 수요가 있었다. “영어 내신 교육의 특징을 간파한 덕분이었어요. 학교마다 사용하는 영어 교과서가 모두 달라요. 내신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선 학원 선생님들이 모든 출판사의 교재를 보고 학교별 시험 대비 교재를 만들어야 하죠. 강사들은 저작권 침해라는 걸 알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어 카페 등 커뮤니티를 통해 교재를 구했어요. 이때 쏠북을 활용해 2차 저작물을 만들면 저작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쏠북에 입점한 교재는 쏠북 웹사이트 내에서만 활용이 가능하다. 다양한 보안 장치를 통해 사용 환경을 제한한 덕분이다. 소비자에게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교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연 단위의 이용료를 지불하면 웹사이트의 전용 PDF 뷰어로 교재를 열 수 있어요. 화면 공유 기능으로 화상⋅녹화 수업을 진행해도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게 됩니다. 교재의 페이지마다 워터마크가 삽입돼있고, 학생의 이름을 입력해야만 출력할 수 있게 만들어 출력 부수를 제한했죠. 소규모 학원도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끔 최대 출력부수를 5개, 100개, 500개로 나눠 요금을 세분화했습니다.”

◇국내 모든 교재가 쏠북에 입점하는 게 목표

관심 분야에서 직접 일해보고 업계의 문제점을 깨달았다는 윤 대표. /더비비드

교재 원문의 저작권과 수업 자료를 온라인을 통해 합법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곳은 쏠북이 유일하다. 사업성을 인정받아 아산나눔재단이 운영하는 ‘마루 360′ 입주사로 선정됐다. 여러 투자사로부터 약 13억원의 투자금도 유치했다. “현재 2000권 이상의 교과서와 출판 참고서를 쏠북에서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 제작한 4800건의 수업 보조 자료(2차 저작물)도 쏠북 마켓에서 구입할 수 있죠. 베타 서비스 출시 이후로 월간 활성 이용자 수는 1만명이 넘습니다.”

국내의 모든 교재를 쏠북에 입점시키는 것이 목표다. 관심 분야에 직접 뛰어들어봐야 그 분야의 문제점을 알 수 있다고 조언했다. “회사원으로서 교육 커뮤니티를 운영했을 때는 교육업계에 있던 문제점을 제대로 알지 못했죠. 직접 학원에 방문해 강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업계의 문제점을 알게 됐어요. 남들이 생각했을 때 사소한 문제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문제를 발견하고 업계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게 느껴지면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죠. 그게 제가 사업을 운영하는 원동력입니다.”

/김영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