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 없는 캐릭터로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작가 슈니따
“무명에게 감정이 날뛰는 내면의 세계는 재밌는 놀이터이자 신기함이 가득한 곳이라면, 인간에게 내면의 세계는 항상 무언가를 해결해야 하는 숙제 같은 장소입니다.” (작품 ‘Double Vision’ 작가노트 중)
시각 요소와 철학적 의미가 절묘하게 맞물리는 것.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이다. 작가 슈니따(31)는 ‘이름이 없다’는 의미의 캐릭터 무명(無名)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린다. 이름 모를 인간들의 내면세계를 조망하는 독특한 작품 세계로 사랑받고 있다. 청년 작가이자 아이들의 예술 강사인 작가 슈니따를 만나 무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들었다.
◇티베트 신자의 오체투지를 보고 느낀 것
슈니따 작가는 평면 작업과 도자 조형 두 가지 작업으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시각 예술가다. 무명이라는 캐릭터를 주축으로 스토리가 있는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다. 귀여운 외양의 무명과 신비로운 세계관의 이색적인 조합으로 예술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곧 열리는 ‘청년미술축제 아트그라운드 2022′에서도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어릴 적부터 그림 솜씨가 뛰어나 미대에 진학한 후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는 서사와 거리가 멀다. 언어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대학에서 관광이벤트학을 전공했고, 오랜 기간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작가가 되는 건 일종의 필연이었다. 그에게 세상은 채울 것으로 가득한 거대한 캔버스였다.
- 처음 붓을 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진로 고민이 깊던 대학생 때 멕시코의 과달라하라로 교환 학생을 떠났어요. 단순히 한국에서 먼 나라는 이유로 택했는데 그때부터 제 인생의 황금기가 펼쳐졌어요. 중남미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죠.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떠난 어느 날, 돌연 스케치북을 사서 주변의 풍경을 그려 나갔어요. 그게 제 그림 인생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슈나’는 아르헨티나식 스페인어로 ‘본명’을 뜻하는데요. 슈나에 스페인어 축약형 ‘ita’를 더해 ‘슈니따’라는 작가명도 지었죠.”
- 흥미로운데요.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요.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다니며 수익을 낼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어요. 결론은 여행 일러스트레이터였죠. 사이판, 중국 관광청 등 다양한 국가의 관광청과 손잡고 여행지 풍경을 그리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일러스트레이터란 일자리가 있었지만 여행을 계속하려면 더 많은 소득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여행 가이드 일도 시작했고요. 3년 동안 우리나라를 거점으로 아프리카와 남미의 관광 가이드로 활동했죠.”
- 여행 가이드라. 엉덩이 무겁게 작업해야 하는 작가와 온도차가 큰데요.
“출장 차 티베트에 갔다가 한 사원에서 오체투지(온몸을 던져 절을 하는 형태) 중인 신자를 본 적이 있어요. 온몸을 바친 탓에 옷은 허름하게 닳았고 이마와 손은 까맣게 물들어 있었죠. 신념 때문에 몸을 불사하는 신자의 모습이 무척 신선했어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한 세상도 존재하는구나’ 깨달음을 얻었죠. 그전까지 저는 여행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보이는 것 위주로 그림을 그렸잖아요. 이제부터는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해 보고 싶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했던 일들을 정리하고 ‘보이지 않는 것’ 위주의 회화 작업을 해보기로 결심했죠.”
- 일러스트와 회화라니. 원래 그림에 취미가 있었나요.
“정말 자주 듣는 질문인데요. 명확히 짚어 말하기 어려워요. 일러스트레이터 시절부터 그림을 채워 나가는 느낌으로 그려 나갔어요. 그림은 너무 자연스럽게 제 삶에 스며들어 목표와 계획을 이뤘고, 제 꿈이 됐죠. 혹자는 저와 그림을 두고 ‘설명할 수 없는 팔자’라고 설명하더라고요.”
◇무명이에게 투영한 인간 세계
작가가 되기로 마음 먹고 2019년 작업 준비에 돌입했다. 2020년 회화 작업을, 2021년 흙으로 빚은 후 굽는 세라믹 작업도 시작했다.
그의 또 다른 직업은 예술 강사다. 주 2~3회 초, 중,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통합 예술 수업을 진행한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소속으로 학생들에게 애니메이션이나 연극과 함께하는 예술 등을 지도한다.
- 작품 철학과 세계관이 궁금합니다.
“제 작품에는 무명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무명이는 인간이 지구에 등장하기도 훨씬 전에 오리온 행성에서 빵 모양의 우주선을 타고 이 별에 왔어요. 실질적인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지구에 와서 굶주림을 해결했는데요. 그 이후 내면적인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본인이 가지고 있지 않은 감정과 표현을 인간에게 만들어줘요. 저는 무명이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세계에서 발생하는 인간 내면의 감정, 표현,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간사의 모든 이야기를 상상 속의 사물 등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죠”
- 무명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작가님을 찾아온 건가요.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각 나라의 설화나 신화 속에 숨겨진 민속 신앙이나 그 지역 원주민을 알아가는 것이었어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프로메테우스’나 드라마 ‘레이즈드 바이 울브스’처럼 태초의 존재를 주제로 하거나 토속 신앙 요소를 활용하는 콘텐츠로부터 영감을 받는 편이기도 하고요. 설화 속에서 등장할 법한 존재로 옛날이야기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이야기를 꾸려 나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 주제가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간에요.”
- 작업 루틴은 어떻게 되나요.
“스토리를 먼저 짠 다음에 도상(시각화 계획)을 세우고 작업에 들어갑니다. 주변의 경험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는 편이에요. 수업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감동적인 부딪힘, 친구들의 사회 생활고충, 저 혼자 지니고 있는 내면의 고민 등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쓰고 이를 시각화하죠. 영화나 책에서 영감을 받기도 해요. 문구 하나를 제 방식대로 해석해서 이를 이야기로 푼 후 도상에 들어가죠.”
- 작업 방식은요.
“동양화 종이에 서양화용 물감인 아크릴 과슈로 채색해요. ‘장지’라고 불리는 동양화용 종이를 사용합니다. 특유의 따뜻한 질감이 너무 좋거든요. 무명이의 복슬복슬한 털 질감을 구현하는데도 적합하고요. 장지의 탄생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측면도 있어요. 장지는 아교를 여러 번 발라 만들어지는데요. 작가라 그런지 노동력이 집약된 물건에서 파생되는 물성을 좋아합니다.”
- 작품 활동은 어느 정도로 하고 있나요.
“올해만 개인전 3회, 단체전 3회를 진행할 정도로 활동을 열심히 하는 편이에요. 갤러리를 통해서 작품을 판매한 적도 있어요. 가격 책정이나 수수료 등 작품 거래 실무 과정이 낯설기도 했는데요. 함께 일했던 디렉터나 갤러리스트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큰 어려움 없이 이 과정을 거쳐온 것 같습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작품 소개도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에요. 아직 신진작가라 제 작품이 비싸게 거래되는 것을 바란 적은 없어요. 가격이 저렴하더라도 보다 많은 분들이 소장하시거나 알아주셨으면 하는 게 제 바람이죠. 이런 마음이 잘 전해졌는지 요즘 아트페어나 전시 참여 권유 연락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샘솟아요.”
- ‘팔리는 작가’로서의 욕심이 날 것 같아요.
“모든 작가의 고민이에요. 예술적 가치와 상업적 가치는 궤가 다르거든요. 두 가치가 맞물렸을 때 좋은 작업을 하면서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작가가 되겠죠. 반대로 예술적 가치만 좇으면 내 틀에 갇히고, 상업적 가치만 좇으면 영원히 타인의 의견에 매몰되고 마는 것 같아요. 항상 두 가치의 접점을 찾으려 해요.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예술은 안 하고 싶어요. 작가 노트도 현학적으로 쓰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죠. 그림을 귀엽게 그리는 이유도 일맥상통해요. 귀엽게 그려서 사람들을 현혹시킨 다음에, 그들이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내면세계에 대한 복잡하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제 예술 작업의 목표입니다. 예술성과 상업성, 둘의 적절한 합의점이 있어야 하죠.”
◇3년 전 가수 하림의 질문에 눈물 펑펑 흘렸던 이유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11월에 열리는 ‘청년미술축제 아트그라운드 2022′ 참가 준비를 하고 있다. 아트그라운드 2022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 서봉갤러리빌딩에서 2부에 걸쳐 열리는 청년 작가 아트페어다. 슈니따를 비롯해 국내 미술 시장에서 주목받는 청년작가 45명이 참여한다. 진영, 이내, 다니엘 신, 이민재, 박한지, 김송리, 권혜현, 이찬주, 한아름 등의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구매도 할 수 있다.
- 아트페어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요.
“무명이의 세계관과 스토리를 어떻게 매력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 중입니다. 최대한 많은 분들에게 무명이를 알릴 수 있는 기회니까요. 10점 내외의 회화 작품을 출품할 계획인데요. 개인적으로는 전시 공간과 무명이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기대가 됩니다. 전시장 디스플레이나 공간 활용에 관심이 많은 편이거든요. 같은 작품도 전시된 공간에 따라 다른 느낌을 창출하기 때문이죠.”
- 이번 행사의 관전 포인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트그라운드 2022는 한국에 얼마나 많은 작가가 다채로운 작업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겁니다. 미술 시장에 막 입문했거나 미술 작품 소장에 첫 도전하시는 분들이라면 방문 해보세요.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보면서 내 취향을 발견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아요. 작가들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나눌 수 있다는 점도 아트페어만의 매력입니다.”
- 아트페어에서 무명이와 마주칠 분들을 위한 감상 팁을 공유해주세요.
“무명이는 사실 표정이 없는 친구예요. 무명이 그림 속에서 표정이 보인다면 그건 감상자의 현재 감정이 투영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 감정을 생각해 보고 그림을 즐겨보세요. 그 속에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지 유추하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셨으면 합니다.”
- 재미있는 놀이처럼 들리는데요. 미술의 가치란 무엇일까요.
“2019년 서울문화재단 티칭 아티스트(Teaching Artist)를 선발하는 자리에서 가수 하림 씨에게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당시엔 제대로 대답을 못해서 펑펑 울었어요.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저 스스로가 너무 미웠거든요. 이후 3년 동안 답을 찾아 나서는 중인데요. 아직도 미술의 가치가 뭐냐고 묻는다면 대답 못하겠어요. 다만 좋은 작품과 좋은 예술이 무엇인지는 알겠어요. 명확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지만 딱 보면 알아요. 미학적으로 아름답거나, 특정한 심상을 자극하는 여운이 있거나. 멀리서 봤는데도 홀로 빛나는 그런 작품은 분명 존재해요.”
- 앞으로의 계획은요.
“청년 미술은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창작의 문은 이미 열렸고 어떤 길 위에 서있는 셈이죠. 물론 과정은 계속해서 변화해요. 작가들에게 청년기는 변화를 무서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성장하는 과정이지요. ‘그동안 많은 직업을 가졌으니, 작업 좀 하다가 작가도 관두는 거 아니냐’는 말을 몇 번 들었는데요. 저 역시 작가라는 과정에 이미 들어섰기 때문에 돌아갈 곳이 없어요. 바로 뒤엔 절벽이 있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제가 구축한 세계와 이야기를 유지하면서도 틀에 갇히지 않고 작업 활동을 계속하고 싶어요. 올해와 내년 상반기에 예정된 일정들을 소화하기 위해 열심히 작업에 임하는 게 제 소박한 계획입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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