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 주문 솔루션 케이즈(CAYS) 개발한 브이아이코리아 신윤정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화마는 모든 것을 삼켰다. 19년 일궈온 1000평(약 3306㎡) 규모의 공장이 하룻밤 새 잿더미로 변했다. 1999년 12월 인쇄 전문 회사 네오프린텍에 벌어진 일이다. 당시 대학교 신입생이었던 브이아이코리아 신윤정 대표(43)는 태어나 처음 아버지의 눈물을 봤다. 신 대표의 아버지는 그 회사의 창업자였다.
그날 신 대표는 마음속 깊이 ‘가업을 잇겠다’는 다짐을 새겼다. 아버지의 곁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결심을 부추겼다. 그로부터 20년 뒤 2019년 패키지(포장) 디자인 스타트업 브이아이코리아를 세웠다. ‘인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창업 2년 만에 패키지 주문 시스템 케이즈(CAYS)를 만들었다. 주문 요청을 넣은 후 원하는 모양과 재질의 패키지 도면을 받아보기까지 단 10분이면 된다. 최소 주문 수량은 1개다. 기존 인쇄·포장 업계에서는 1000개가 마지노선이었다. 와인유통업체 나라셀라, 스포츠의류회사 아이더, 치킨 프랜차이즈 멕시카나 등 60여개 업체가 케이즈를 이용하고 있다. 신 대표를 만나 그가 가업을 잇는 방법을 들었다.
◇아버지의 눈물
단국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해 새내기의 삶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었을 거예요. 라디오, TV에서 ‘소방차 50대가 출동했다’면서 속보가 쏟아졌어요. 알고 보니 아버지의 인쇄 공장이었죠. 어린 마음에 ‘우리 집이 망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일어섰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물을 퍼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한겨울이었기 때문에 소방차가 쏟아낸 물을 그대로 뒀다간 다 얼어버렸을 거예요. 가족, 직원들은 물론 축구 동호회 회원들까지 모여, 쓸 수 없는 기계는 밖으로 꺼내고 고쳐 쓸 수 있는 기계는 그을음을 닦아 정비했죠. 그렇게 화재가 난 지 일주일 만에 공장을 재가동했습니다.”
아버지가 회사를 재건하는 사이 신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고 2004년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중어중문학을 복수전공을 하면서 중국어에 욕심이 생겼어요. 난징대학교 대학원에서 기업전략관리를 공부했죠. 언젠가 아버지의 사업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선택한 진로였습니다.”
2008년 귀국한 후에도 공부는 계속됐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쇄화상학과 석사 과정을 밟았다. “공부만 한 건 아니에요. 동시에 이얼싼 중국문화원에서 마케팅 기획팀에서 일했습니다. 중국 유학을 고민하는 학생을 상담하고 학원에 등록하도록 했죠. 필살기는 중국 유학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예요. 대학생 생활을 들려주는 수능강사처럼요. 학생 1명의 등록 비용은 350만~400만원 정도였는데 제 월급은 200만원 수준이었죠.”
◇영업사원이 왜 사무실에만 있을까
나이로 달걀 한 판을 채우고 나니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에게 네오프린텍 생산관리 파트로 들어가 일을 배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버지는 미덥지 않아 하셨어요. 적당히 버티다가 다른 일 찾아가겠지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오전 8시마다 전체 회의가 있는데 매일 아침 7시 30분에 출근해서 바닥을 쓸고 기계에 앉은 먼지를 닦았어요.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아버지께서도 진지하게 봐주셨죠.”
잉크 냄새 맡아가며 인쇄 공장에서 일하던 어느 날,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영업 사원이 밖에 나가서 영업은 안 하고 사무실에 앉아만 있더군요. 기존 고객의 발주 물량을 관리하느라 신규 고객 유치는 아예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 다시 부탁, 아니 통보했어요. 영업부에서 일하겠다고요. ‘제조업에서 생산 관리보다 중요한 건 없다’며 반대하셨지만 3개월만 시간을 달라고 설득했습니다. 영업은 3개월 뒤부터 성과가 나거든요.”
2013년부터 박람회란 박람회는 다 나갔다. 뷰티·전자·식품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인쇄보다 ‘패키지(포장)’에 집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미 네오프린텍에선 삼성전자 등 대기업 제품의 패키지를 만들고 있었어요. 하지만 거기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새로운 고객사를 찾아 나섰죠. 한 달에 2번씩 ‘웰컴 데이’를 열고 홍보·마케팅 종사자를 초청해 우리 패키지를 소개하는 자리도 만들었습니다.”
단골 고객사인 화장품 제조사 ‘유알지’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뷰티 박람회에서 처음 명함을 주고받았어요. 첫 주문으로 하나에 200원 하는 단상자 1000개를 주문하더군요. 단 20만원어치여도 어찌나 감사했게요. 그 물량이 나중엔 40억원까지 늘었습니다. 이렇게 몇 번의 테스트를 거쳐 가며 50여 개 신규 고객사를 더 유치했죠.”
대면 영업을 하면서 가장 말문이 막히는 순간은 ‘견적’ 얘기가 나올 때였다. “보통 영업사원이 엑셀로 견적을 내는데요. 공식 기준이나 통용되는 프로그램 같은 게 없다 보니 견적 내는 사람마다 제각각이었죠. 견적을 요청하려면 도면 제작이 먼저 이뤄져야 합니다. 디자인 회사, 인쇄소, 목형(나무 모형)제작사를 모두 거치고 도면을 받아 견적을 내기까지 족히 2주는 걸리죠. 사정을 모르는 고객사 담당자가 ‘예산 짜야 한다’며 독촉해도 별수 없었어요.”
문제 해결을 위해 창업을 결심했다. “전국에 인쇄 업체만 해도 2만 개가 넘어요. 고객은 단가가 낮은 업체를 선택하게 되는데 가격 경쟁을 하다 보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꼴이 되죠. 안 그래도 어려운 인쇄업계에서 이런 무의미한 경쟁을 하루빨리 종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합리적으로 쓸 수 있는 패키지 주문 솔루션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최소 주문 수량 ‘1개’의 비밀
2019년 8월 브이아이코리아(VI Korea)를 설립했다. 회사 문을 열자마자 한 일은 역시나 ‘영업’이었다. 개발에 당장 뛰어들기엔 땡전 한 푼도 없었기 때문이다. “절대 아버지에게 손 벌리고 싶지 않았어요. 패키지, 인쇄 신규 고객을 찾아다니면서 2년간 매출 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책을 찍어내고 마스크 패키지를 만들면서 연 매출 18억원을 냈어요. 이 돈은 고스란히 개발비로 들어갔죠.”
‘패키지 주문 솔루션’ 개발에 돌입한 건 2020년이다. 패키지로 가장 많이 제작하는 10가지의 박스 형태를 기초로 삼았다. 가로·세로·높이 등의 수치를 입력하면 바로 3D 도면이 나오도록 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 재료, 수량 등을 추가로 입력하면 견적까지 받아볼 수 있도록 했다. 8개월간 개발한 내용을 담아 ‘인공지능을 활용한 패키지 디자인 제공 시스템 및 그 동작 방법’이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등록했다.
2021년 10월 케이즈(CAYS)를 출시했다. 다른 패키지 업체와 가장 큰 차별점은 최소 주문 수량(MOQ)이 1개라는 점이다. “공식 홈페이지에선 10개부터로 돼 있지만 개별적으로 문의하면 그 이하로도 주문할 수 있습니다. 사실 1개는 샘플 제작용 기계로 금방 만들기 때문에 제일 쉬운 수량이에요. 제일 어려운 수량은 100개부터죠. 샘플 제작용 기계로 만들면 너무 오래 걸리고, 대량 생산용 기계로 하기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요. 하지만 갈수록 이런 다품종소량생산 주문이 많아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간 넘어야 할 산이라면 내가 먼저 넘자는 심산이었죠.”
영업사원 수백·수천 명이 할 일을 케이즈 혼자서 도맡아 한다. 케이즈가 거래를 물어 오면 제조협력사 3곳에 제작을 맡긴다. “지금은 경기 파주, 경북 구미 등에서 패키지를 제작합니다. 2023년 안에 협력사를 300곳으로 늘리는 게 목표예요. 고객과 제조사의 거리를 줄이면 물류비를 30만~40만원 정도 아낄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부심
최근엔 케이즈 2.0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올해 7월 출시 예정이다. “매년 나오는 초코파이라도 버전이 다 달라요. 글꼴, 유통기한 등 뭐 하나라도 잘못 찍히면 전량 폐기해야 합니다. 실제로 고객사 담당자가 잘못된 분리배출 마크를 사용한 바람에 3000만원의 손실을 본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필수 인증 마크, 알레르기 성분 오탈자처럼 실수가 잦은 부분을 자동으로 검사하는 데이터 자동 검수 시스템을 도입할 거예요.”
지난 12월 브이아이코리아는 은행권 청년창업재단(디캠프)이 주최하는 2022년 디캠프 올스타전 무대에 올랐다.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어요. 그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절대 놓을 수 없어요. 그 어떤 디자인 회사, IT 회사, 마케팅 회사도 케이즈를 뛰어넘는 솔루션을 만들 수 없을 거라고 자부합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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