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뷰티 연구 시리즈
2024년 한국산 화장품 수출액이 처음으로 100억달러를 넘었습니다. K뷰티 글로벌 성장 주역은 중소 화장품 회사인데요. 이들을 차례로 만나봅니다.
“보통 파운데이션 몇 호 쓰세요? 21호요? 그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살펴보시면 좋아요.”
이선영(42) 티르티르 브랜드기획부문장이 서울 성수동의 팝업스토어를 찾은 20대 여성 고객에게 말했다. 고객은 매대를 가득 채운 쿠션 팩트를 이것저것 발라 보며 비교하고 있었다. 옆에는 ‘45 SHADES(45가지 색상)’라는 팻말이 놓여있다. 전 세계에서 1.7초마다 하나씩 팔린다는 인기 상품, 티르티르의 ‘마스크핏 레드 쿠션’의 다채로운 색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티르티르(TIRTIR)는 해외에서 잘 나가는 K뷰티 주역이다. 2024년 매출 3000억원을 예상하는데, 이중 약 80%가 해외에서 난다. 북미, 유럽, 일본, 중동, 인도,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100여개 국가에 진출하는 등 성장세가 가파르다. 2024년 상반기에는 미국 아마존에서 뷰티 카테고리 매출액 1위를 차지했다. 일본에서도 각종 뷰티 어워드에서 34관왕을 했다. 일본에선 워낙 인기가 좋아 일본 회사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은데, 엄연히 한국 토종 회사다.
2025년에는 한국 회사답게 국내에서 인지도를 넓히고, K뷰티 전성기를 다질 계획이다. 그 시작으로 티르티르는 작년 9월 아모레퍼시픽 출신 이선영 부문장을 영입했다. 이 부문장은 티르티르 브랜드를 재단장하고 새 전략을 짜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 부문장을 만나 티르티르의 성공 비결과 향후 계획을 물었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한국 회사
티르티르는 2019년 설립 후 코로나 사태가 터졌지만 오히려 이 기간 일본과 미국에서 입지를 탄탄하게 다졌다. 시장 후발주자이자 작은 회사가 빠르게 성장한 비결 중 하나가 다양한 색상의 쿠션 팩트다. 피부색을 보정하고 잡티를 가리는 쿠션 파운데이션은 우리나라에선 색상 종류가 다양하지 않다. 전부 상아색이다. 밝기는 ‘호수’로 나타내는데, 숫자가 작을수록 밝다. 21호, 24호가 흔하고 많아봤자 17호나 19호 정도가 추가된다.
하지만 티르티르는 색상을 계속 추가해 현재 45개까지 늘렸다. 백인부터 흑인까지 아우르는 것은 물론이고, 인종이 같아도 저마다 다른 밝기나 빛깔까지 고려해 고를 수 있다. “‘언더톤’이라는 게 있습니다. 피부색이 같아도 누구는 피부에 빨간빛이, 누구는 노란빛이, 누구는 올리브 빛깔이 돌아요. 흔히 말하는 ‘퍼스널 컬러’가 이런 언더톤 때문에 나뉘는데요. 뷰티 시장이 성장하면서 파운데이션 색상도 섬세해지길 원하는 소비자가 많다는 걸 깨닫고 색상 종류를 늘린 것이죠. 이건 자본이 풍부한 대기업에서도 쉽게 시도하기 어려운 도전입니다.”
소비자 의견을 지나치지 않고 제품 개발에 반영한 결과다. ‘미스달시(MissDarcei)’라는 닉네임을 쓰는 흑인 인플루언서가 처음 사용한 티르티르 마스크핏 레드 쿠션 색은 자기 피부색보다 훨씬 밝았다. 이에 아쉬움을 드러냈는데, 티르티르는 한 달 뒤 이 유튜버를 위한 어두운 색상 호수를 개발해 선물했다. 새로운 색상을 발라본 유튜버는 자기 피부색에 딱 맞는다며 놀라워했다. 이 영상은 빠르게 각종 SNS 채널로 퍼져나갔다.
다양한 색상 호수는 인플루언서를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경험해보고 싶은 콘텐츠’로 작용했다. ‘내 피부에 맞는 색상을 찾자’며 티르티르 제품 후기를 다룬 영상들이 속속 등장했다. “화장품에 내 피부를 맞추는 게 아니라, 내 피부에 맞는 색상이 티르티르에는 반드시 있다는 걸 내세웠죠. 자신에게 어떤 색상 호수가 맞는지 리뷰하는 과정 자체가 콘텐츠가 된 겁니다.”
◇제품 기획 단계에서 ‘콘텐츠화’ 염두
이 부문장은 작년 9월 티르티르에 합류했다.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중어중문학과 경영학을 복수전공한 그는 2006년 삼성전자 공채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11년 아모레퍼시픽으로 이직했다. 에뛰드하우스가 일본, 홍콩, 중국 등지에 진출할 때 선봉장에 있었다. 북촌 설화수의 집, 설화수 리브랜딩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맡았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걸 좋아해서 신규팀이나 TF팀이 생길 때마다 차출이 됐어요. 덕분에 상품 개발(BM), 브랜딩 전략, 온오프라인 마케팅, 고객관리까지 모든 과정을 경험했어요.”
대기업에서만 18년가량을 보낸 그에게 티르티르는 나른해질 법한 인생에 새로운 활력이 됐다. "이직 제안을 받았을 땐 ‘또다시 새로운 곳에 가서 힘들게 살아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런데 복잡하게 생각할 게 없겠더라고요. 아직 40대인데 벌써 안주하고 싶지 않았어요. 대기업에서 일하면서 경험을 많이 쌓았으니 그 경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에서 능력을 발휘해보고 싶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한 이 부문장에게 떨어진 첫 미션은 ‘티르티르 리브랜딩’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란 브랜드의 비전과 방향을 관리감독하는 사람이다. “티르티르가 해외에선 쿠션으로 유명하지만 국내에서는 스킨케어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었어요. 그런 브랜드 인식에 대한 차이를 없애고 통합된 메이크업 브랜드로 리뉴얼하고자 했습니다.”
리브랜딩을 위한 첫 프로젝트가 ‘공간 마케팅’이다. 서울 성수동에서 단독 팝업스토어를 연 이유다. “이전까지 온라인에서 주로 티르티르를 만날 수 있었다면, 앞으로 오프라인 접점을 늘릴 계획입니다. ‘고객과의 소통’, ‘고객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철학’을 중시하는 만큼, 현장에서 많은 분들은 만나고 직접 의견을 들을 생각이에요.”
출발이 좋다. 성수 팝업에 하루 1500명가량이 다녀간다. 10대에서 4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중요한 건 그냥 둘러보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내게 맞는 색상은 무엇인지 찾고 즐기느라 머무는 시간이 30분, 1시간을 훌쩍 넘긴다는 점입니다. 소비자도 이런 소통 공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신제품을 기획할 때부터 어떻게 하면 ‘콘텐츠 소재가 될지’를 고려한다. 발림성, 커버력 등 우수한 제품력은 타협할 수 없는 근본이라서 달리 강조하지 않을 뿐이다. 팝업스토어에서 처음 선보인 신제품 ‘AI필터 쿠션’도 이런 철칙 아래 탄생했다. “‘AI필터 쿠션’이라는 작명도 직관적으로 제품의 강점을 전달하고자 하는 고민 끝에 나왔어요. 또 인플루언서에게 선물하는 ‘시딩 박스’라는 게 있는데요. AI필터 쿠션을 바르면 AI 카메라가 보정한 것처럼 피부 표현이 매끄럽게 된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상자 뚜껑을 열면 ‘찰칵’하고 찍는 소리가 나게 했어요. 그저 예쁘게 포장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품을 열어보는 과정까지 고려한 결과물입니다.”
◇글로벌 성장 주역으로 만든 실행력 ‘일단 해보자’
이 부문장은 티르티르의 가장 큰 강점으로 ‘실행력’을꼽았다. “C레벨(회사의 임원급)분들이 자주 하는 얘기가 ‘일단 해보자’예요. 작은 회사일수록 혁신을 위한 파괴적인 실행력이 필요한데요. 티르티르는 손해를 보더라도 회사의 소명, 브랜드 철학을 위한 것이라면 일단 도전해봅니다. 45가지 쿠션 색상을 만들기 시작한 이유도 이런 실행력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겁니다.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기회가 열릴 거라는 회사 분위기가 제 개인적인 커리어 철학과도 맞닿아 있어요.”
티르티르는 지속적인 소비자 소통을 통해 브랜드 충성도를 높여나갈 계획이다. 브랜드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리브랜딩은 몇 번의 특색 있는 마케팅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올해는 정성적으로는 '쿠션팩트' 하면 티르티르, 티르티르 하면 '내 피부에 꼭 맞는 쿠션'을 연상시키게 하고 싶고요. 양적으로는 뷰티 카테고리 매출 1위를 기록하고 싶습니다.”
/이연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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