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명퇴 후 연전연패한 37년 삼성맨, 선택한 뜻밖의 일

더 비비드 2024. 7. 11. 11:25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품질팀 37년 근무
폴리텍대 수료 후 시설관리직 재취업 성공
4개월만에 기능사 2개, 전기기사 취득 도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2.7세다. 퇴직 이후에도 새로운 삶을 위한 일이 필요하다. 꼭 이전 경력을 이어갈 필요는 없다. 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맞춤형 취업 프로그램이 좋은 기회가 된다. 취업 프로그램을 통해 인생 2막을 개척한 이치권(57) 씨를 만나 재취업 성공 노하우를 들었다.

◇퇴직 후 찾아온 재취업의 시간

출처: 본인

이치권 씨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서 37년 간 일했다. 공고를 나와 처음 들어간 직장에서 단 한 번도 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품질팀에서 양산 전 신뢰성 평가 업무를 맡았다. 온도, 습도, 정전기 등 환경을 조절해서 반도체의 동작을 시험하고, 양산 여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2019년 11월 31일, 명예퇴직을 했다. 처음엔 재취업에 자신이 있었다. 워크넷으로 한 달 두 번 이력서를 내고 면접도 여러 차례 봤다. “5달에 걸쳐 10여 곳에 지원했는데 연락 오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어요. 예전에는 반도체 대기업 출신 퇴직자가 재취업이 잘됐다고 하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나가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런가봐요. 코로나까지 겹쳐서 더욱 힘들었습니다.”

출처: 본인

삼성전자 재직 시절 직장동료들과 함께 한 이치권 씨

눈을 낮춰 소규모 업체도 지원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불안해하다가 귀농을 선택했다. 은퇴 전 막연하게 꿈 꿨던 시골 생활이었다. “치열한 경쟁에 지칠 때면 스트레스 없는 자연에서 생활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을 하곤 했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한 달 버티기도 어려웠습니다. 휴양 차원에서 일주일 쉬고 회사로 복귀하는 거면 모를까. 돌아갈 곳 없다는 막막함에 쉬는 것 자체가 힘들더군요.”

먼저 퇴직한 선배들의 조언이 떠올랐다. 60살이 넘어서도 현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야가 ‘전기’라는 얘기였다. “전기 쪽이 좋다고 해서 배울 곳을 알아봤어요. 처음 막막했는데요. 학원 수강보다는, 국가 지원이 있고 대학 타이틀도 있어 신뢰할 수 있는 폴리텍대를 선택했습니다.”

◇처음 접하는 분야에 당황

출처: 본인

삼성전자 재직 시절 직장동료들과 야유외를 하고 있는 이치권 씨

성남 폴리텍대에 들어가 4개월간 ‘신중년 스마트전기 특화과정’을 수강했다. 재취업을 꿈꾸는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비(非) 학위 직업훈련 과정이다. 시설 안전관리자 양성을 목표로 실무형 기술 훈련을 제공하고 취업도 주선해준다.

공부하면서 자격증 취득을 우선순위로 뒀다. 취업하려면 바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국가공인 자격증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전기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는 공인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했습니다. 신중년 프로그램 자체가 전기기능사 자격증 취득을 돕는 이론, 실무 커리큘럼으로 구성돼 있어 큰 도움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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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텍대 신중년 과정을 듣고 있는 이치권 씨

전기 분야는 해본 적이 없어서 초반에는 힘들었다. “저항, 직류, 콘덴서, 전동기 등등. 지금 생각하면 너무 기초적인 용어인데 처음에는 애먹었어요. 거의 처음 접하는 것들이라 생소했죠. 다행스럽게도 교수님들이 비전공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교육해야 할지 잘 알고 계셨어요. 맥을 정확히 짚어주시는 거죠. 무한 반복 질문에도 세심하게 지도해주셨습니다.”

◇4개월만에 자격증 2개 취득

-개인적으로 어떻게 공부하셨나요.

“실습실이 항상 개방돼있어요. 6시 수업 끝나면 실습실로 가서 부족한 부분을 연습했죠. 주말에도 갔고요. 전기기능사 실기시험은 4시간 반 만에 과제를 마쳐야 해서 손이 빨라야 합니다. 저도, 동기들도 나이 탓에 손이 느려 시간 맞추기가 힘들었는데 반복 연습을 통해 속도를 높였습니다. 과제를 퀄리티 있게 끝내기 위해서 밤에 남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본인

폴리텍대 신중년 과정 동료들과 함께 한 이치권 씨

-동기들은 어떤 분들이었나요.

“저와 비슷해요. 다른 직군에서 오래 일하다 전기로 새로 도전하는 분이 대부분이었죠. 저 같은 대기업 출신도 있고 공무원, 경찰, 심지어는 대학교수를 하던 분도 있었어요. 대부분 비전공자라 저처럼 처음에는 용어 이해 조차 힘들어했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서로 힘을 주면서 함께 적응해 갔습니다.”

-분위기가 어린 학생들 못지 않아 보입니다.

“다 같이 고3으로 돌아간 것처럼 공부했습니다. 숨소리 하나 안 날 정도로요. 우리 기수에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모이기도 했고, 취업하려면 자격증이 필요하니까 모두가 하나같이 집중했습니다. 50대 후반 나이에 전기 기능사 시험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다들 노력했어요.”

출처: 본인

폴리텍대 재학 시절 실습을 하는 이치권 씨

모두가 좋은 성과를 냈다. 동기 26명 모두 전기기능사나 승강기 기능사 중 하나의 자격증을 땄다. 둘 다 딴 사람도 많다. 이치권 씨가 그 중 한 명이다.

-취업과 관련해선 어떤 교육을 받았나요.

“이력서 쓰는 방법을 새로 배웠습니다. 현직 경험이 많은데 그대로 쓰는 것보다 시설관리 분야와 맞게 쓰라는 조언을 들었어요. 이전에는 이런 요령을 몰랐습니다. 제가 지원한 곳에 폴리텍대가 추천서도 써주셨죠.”

◇아파트 시설관리직 재취업 성공

출처: 본인

폴리텍대 재학 시절 실습을 하는 이치권 씨

동기 중 3명이 수료 전 취업에 성공했다. 이치권 씨는 거기 포함됐다. 현재 집 근처 아파트 시설관리자로 일하고 있다. “전기실에서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는 전기를 관리하는 안전관리 일을 맡고 있어요. 겨울철에는 내부 결로 탓에 전기 합선이 잦은데요. 누전차단기가 내려가는 경우가 많아 손 볼 일이 꽤 많아요.”

-취업 성공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두 가지 자격증을 모두 취득한 게 크죠. 이름 있는 대기업 경험보다는 바로 일할 수 있다는 능력을 갖추고 그걸 어필하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 학교가 추천도 해주셨고요. 제가 일하는 직장이 무경험자는 뽑지 않는데 학교 추천을 믿고 뽑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더 열심히 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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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권 씨의 일터 현장

-새로운 일을 하는 건 어떤가요.

예전의 저는 전기실 근무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아파트 전기실은 2만2900V 고압이 들어와요. 이걸 380V 저압으로 변환하는 곳에서 늘상 근무하는 일이라 두렵게 느껴지죠. 지금은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폴리텍에서 안전관리부터 전기 다루는 법까지 모두 배운 덕입니다.”

전기기사 자격증 취득에 도전하고 있다. 얼마전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전기기사 자격증은 대학교 수준의 공부를 요구해요. 전기기능사와는 난이도 자체가 다르죠. 10배 이상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끝까지 도전할 계획이에요. 전기기사를 취득하면 관리자급으로 취업이 가능하거든요. 제주도에서 시설관리 일을 하며 1년 정도 살아보고 싶은 꿈도 있습니다. 돈 벌며 여행하는 거죠.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전기 관련 일을 하게 돼서 행복합니다.”

출처: 본인

이치권 씨

-재취업 준비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변하지 않는, 어디서나 필요로 하는 일을 택하세요. 30대, 40대 초반만 해도 이전 경력을 살려 원하는 분야로 취업할 수 있어요. 60살이 되면 다릅니다. 젊은 사람들과 경쟁해야 해서 재취업이 어렵습니다. 반면 전기 분야는 수요가 늘 있는 분야에요. 전기 설비용량이 1,000kW 이상이면 반드시 전기안전관리자를 선임하라고 법에 명시돼 있거든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현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야이니 한 번쯤 꼭 도전해 보세요.”

/김윤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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