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첫 면접에서 '뽑아주셔도 나갈겁니다', 1억5000만원으로 해낸 일

더 비비드 2024. 7. 9. 13:15
화장품 원료 업체 창업 도전기

이범주 대표 제공

K뷰티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회장품 회사마다 '좋은 성분을 썼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성분들 자체적으로 만든 회사는 거의 없다. 한국콜마 같은 원료 업체에 의뢰한다. 화장품 원료 시장은 한국콜마, 코스맥스 등의 독무대였는데 최근 좋은 스타트업도 나타나고 있다.

스타트업 라피끄는 액체형 추출물이 아닌 고체 상태 식물을 그대로 담은 화장품 원료를 만든다. 특허까지 받은 ‘천연식물체 연화기술’ 이 핵심이다. 셀트리온 등 내로라하는 20여 개 화장품 업체의 40여 개 품목에 재료로 들어간다. 이범주(43) 라피끄 대표를 만나 특허기술을 이용한 창업기를 들었다.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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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주 대표는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분자생물학을 공부했다. 2004년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화장품 ODM 1위 업체인 한국콜마에 병역특례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ODM은 개발력을 갖춘 제조업체가 판매망을 갖춘 유통업체에 상품을 제공하는 생산방식을 말한다. 한국콜마 중앙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며 화장품의 내용물을 연구했다.

사회초년생 시절부터 창업을 꿈꿨다. “면접관에게 ‘15년만 근무하고 창업하는 게 꿈’이라고 말할 정도였거든요. 낯간지럽게 들리시겠지만 내가 가진 능력을 회사에 전부 바치기 아깝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나만의 기술로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식물을 원료로 /이범주 대표 제공, 더비비드

직장 생활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  “직장을 단순히 돈 버는 장소가 아니라 언젠가 창업하게 되면 도움이 될 경험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콜마에서 6년간 일하다 홈플러스 상품기준관리팀으로 이직해 유통과 생산관리를 담당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과 농업생명과학대학 선임연구원으로 옮겨 창업에 필요한 역량을 키웠다.

2016년 창업을 결심하고 사직서를 냈다. 전 직장 대표가 든든한 아군이 됐다. 이 대표에게 투자금으로 1억 5000만 원을 선뜻 내놓은 것이다. “실적이나 비즈니스를 보고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게 성공 확률이 높다면서 투자금을 주시더군요. 그 투자금으로 맨바닥에서 실험실 하나를 뚝딱 만들었습니다. 실험대, 의자, 저울, 믹서 등 화장품 연구소에서 쓰는 기본 장비를 마련하고 나니 손에 남은 건 다시 0원이었죠.”

◇문지르면 녹는 꽃잎

첫 투자금으로 받은 1억 5000만 원으로 실험실을 만들었다. /이범주 대표 제공

2017년 1월 충남 천안시에 화장품 연구개발 전문회사 라피끄를 세웠다. 창업 후 3개월간 시장조사를 하고 화장품 원료샘플을 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대표가 화장품 회사를 창업했다는 소식을 들은 전 직장 동료에게서 첫 화장품 연구개발 의뢰를 받았다. “꽃잎이 그대로 들어간 수딩젤을 개발해달라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꽃잎을 그대로 넣어봤자 보기에만 예쁘지 피부에 스며들게 할 순 없다고 했죠. 그래도 내심 한번 도전해보고 싶더라고요.  꽃잎을 그대로 넣을 수 있는 기술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2017년 4월 천연식물체 연화기술(SofTech) 화장품 첫 생산의 순간. /이범주 대표 제공

밤낮없이 연구해 시제품을 만들었지만, 퇴짜를 맞았다. “피부에 꽃잎 잔여물이 남아서 지저분했어요. 이 잔여물을 녹이는 방법을 찾기 위해 다시 연구실에 틀어박혔죠.”

한 달간의 연구 끝에 천연식물체 연화기술(SofTech)을 개발해냈다. "화장품에는 'OOO 추출물'이란 말이 꼭 쓰여있죠. '추출물'은 다시 말해 대상물에서 뽑아낸 액체만 쓴다는 겁니다. 추출 과정에서 유효성분이 파괴되기도 하고 잘 추출되지 않기도 해요. 저희는 추출과정 자체를 없앴습니다. 식물을 그대로 넣고 사용자가 사용할 때 녹아 피부에 흡수되도록 한 거죠. 이 기술은 전 세계에서 저희만 구현할 수 있습니다."

라피끄 사무실 한켠에는 화장품의 원료로 쓰이는 이름 모를 식물이 가득 쌓여있었다. /더비비드

지금까지 17건의 특허를 등록했다. 식물이 스르륵 녹는 제형을 띄는  원료로 만드는 기술, 그 원료를 화장품에 넣는 기술, 식물이 녹는 정도를 측정하는 기술 등이다.

특허기술을 활용한 첫 제품이 2017년 4월에 나온 벨라씨앤씨의 수딩젤이다. 화장품 용기를 보면 장미와 카렌듈라의 꽃잎이 둥둥 떠 있다. 수딩젤을 덜어 피부에 문지르면 꽃잎이 녹아 사라진다.

하지만 초기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세상에 없던 개념을 도입한 기술이다 보니 사람들이 낯설게 느낄 수밖에요. 식물이 그대로 들어가는 것과 추출물을 넣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발로 뛰어다니며 알렸습니다. 화장품 회사의 브랜드매니저들을 찾아다니며 시각적인 부분을 먼저 어필했죠. 손으로 문지르기만 하면 잎이 사라지는 걸 보여주면서요."

보기에 신기하기만 한 게 아니라 유효성분의 함량에서도 뚜렷한 특징이 있다며 영업했다. “시판 중인 추출물 제품 대비 저희 기술을 적용한 제품은 고형분을 50~120배 정도 더 함유하고 있습니다.”

정부 과제나 스타트업 지원사업을 찾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더비비드

정부 과제나 대기업의 스타트업 지원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지원사업창업도약패키지 지원사업, 창업성장기술개발사업을 통해 연구를 이어나갔다.

스타트업의 위기인 ‘데스밸리’에서 고꾸라질 뻔한 적이 있다.  “작년 9월 사무실 문을 닫아야 할 만큼 자금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때 찾아온 기회가 웰컴투팁스(Welcome to TIPS)였어요.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주최한 2020 IR 피칭대회(투자유치 PT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죠. 그날 예비투자자의 명함만 몇십장을 받았는지 몰라요.”

온라인으로 PT가 송출된 날 상상벤처스 이효진 이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장 다음날 미팅을 하자더군요. 이튿날 아침 8시에 2억 원을 투자받는 서류에 사인했습니다. 단백질, 비건 등 유행 따라 바뀌는 기술이 아니라 꽃잎에서 잎사귀, 해조류까지 녹일 수 있다는 점에서 확장성이 높은 기술이라고 평가했다고 들었습니다.”

올해 더 좋은 소식이 있었다.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가 주최한 디데이 본선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여러 곳에서 기술력을 인정받는 것 같아 좋습니다."

◇미식동원(美食同原)

2017년 12월 폼클렌저를 생산하는 모습. /이범주 대표 제공

라피끄의 천연식물체 연화기술이 적용된 제품은 5년 간 140만 개 이상 팔렸다. 그 중 100만 개 이상이 2020년 1월부터 2021년 6월 사이에 판매된 수량이다.

이 대표는 연구를 멈추지 않는다. “꽃잎을 녹이는 것에서 시작해 잎사귀, 과일 껍질 그리고 최근에는 해조류를 녹이는 기술까지 확보했습니다. 지금 새로운 품종의 꽃을 육종하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식물마다 효능이 다른데 그 효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른 화장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효능을 낼 수 있는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서죠.”

라피끄는 농업기술실용화재단에서 주관하는 2021 그린바이오 벤처 육성사업에 선정됐다. 실용화재단, 롯데벤처스, 위쿡이 주관하는 미래식:단 (The Food Changer)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 1기에 선정돼 롯데그룹과 함께 천연식물체 연화기술을 활용한 가공식품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이범주 대표 제공

국내 식품 대기업과 천연식물체 연화기술을 활용한 가공식품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식물을 원료로 하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 화장품과 식품은 뿌리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식물체 연화기술을 활용해 화장품을 만들다가 식품을 개발하기로 한 건 어쩌면 당연한 단계일지도 모르죠. 반대로 식품산업에서 버려지는 부산물을 이용한 화장품도 연구 중입니다.”

창업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힘들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사업 초기 충남 아산에서 서울까지 2시간 거리를 출퇴근했어요. 출근할 때, 퇴근할 때 마음이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퇴근하면서는 ‘그만둘까’를 항상 생각했어요. 화장품 회사에 소장으로 오라는 제안이 여러 번 있었는데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싶었죠.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이 시장을 바꿔보겠다!’라는 열정이 다시 끓어올랐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저러다가 금방 지치겠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고정관념을 깨는 게 스타트업이 가는 길 아닐까요.”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