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 출신 삼성전자 디자이너의 창업 도전기
MZ세대는 직업이나 직장을 선택할 때 다른 세대와는 다른 판단 기준이 있다. '워라블'(일과 삶의 조화)이다. '워라블'은 '일과 삶을 융합하다(Work-Life Blending)'를 줄인 말로 업무와 일상의 적절한 조화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뜻한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과는 궤를 달리한다. 워라블을 표현하는 또 다른 단어로는 ‘덕업일치(덕業一致)’가 있다. 마니아를 뜻하는 ‘덕질’과 직업이 일치한다는 뜻으로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분야의 일을 업으로 삼은 경우를 말한다.
삼성전자 10년 경력을 뒤로하고 덕업일치의 삶으로 뛰어든 사람이 있다. 툰스퀘어의 이호영 대표(37)다. 이 대표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만화광이었다. 누구나 쉽게 만화를 그릴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에서 AI 웹툰 서비스 ‘투닝(Tooning)’을 개발했다. 글을 쓰면 그에 어울리는 만화를 만들어주는 인공지능 서비스다.
작년 12월 베타버전을 출시한 이후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프랑스에서도 투닝을 사용하고 싶다는 문의가 쏟아졌다. 이 대표를 만나 덕업일치의 이상과 현실에 대해 들었다.
◇삼성전자 10년 차에 퇴사
이 대표는 만화방 세대다. “한 권당 200원을 내고 만화책을 빌려보곤 했죠. 요즘 웹툰을 보면 ‘다음 화를 미리 만나보라’며 결제를 유도하는데요. 그 시절에도 단행본으로 출간되기 전에 연재되는 만화를 보려면 점프나 챔프 같은 잡지를 빌려봐야 했습니다. 제가 그 잡지를 꼬박꼬박 빌려 보는 열정적인 꼬마 구독자였죠.”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8살. 좋아하는 만화를 직접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누나가 거실에 앉아서 슥삭슥삭하더니 손오공을 뚝딱 그려내더라고요. 그때부터 저도 그림에 푹 빠졌습니다. 중학생 때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모아 만화책을 만들어 5000원을 받고 팔기도 했죠.”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도 무조건 ‘미대’만 바라봤다. 삼수 끝에 2005년 홍익대학교 디지털미디어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디자인을 바탕으로 미디어 아트와 코딩을 배웠다. 하지만 취업은 현실이었다. 예술의 끈만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2010년 대학 졸업과 함께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휴대전화를 만드는 무선사업부의 UX 디자이너가 됐다. UX는 사용자가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직간접적으로 이용하면서 축적되는 총체적 경험을 뜻한다. 카메라 앱 UX 담당자로서 사진을 찍을 대상에 카메라 렌즈를 가져다 대면 무슨 사물인지 인식하도록 하는 기술과 관련한 디자인을 했다.
“직장인으로 살면서도 만화를 놓을 수 없었습니다. 삼성전자 디자이너 겸 웹툰 작가 지망생 생활을 수년간 했죠. 포털사이트에 잠깐 웹툰을 연재한 적도 있었지만 본업을 핑계로 웹툰 그리는 일을 미루게 되더군요. ‘예술하는 사람은 따로 있구나’란 생각에 좌절했습니다.”
웹툰 작가로는 쓴맛을 봤지만 좌절의 경험은 또 다른 진로의 토대가 됐다. 2017년 삼성전자 사내벤처 육성 프로그램 C랩(C-LAB)에 도전했다. “‘내가 잘 아는 인공지능 관련 기술과 내가 좋아하는 웹툰을 결합해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에 자신이 없는 사람도 글만 쓰면 인공지능이 내용을 인식해 만화를 대신 그려주는 겁니다.”
함께할 동료를 모았다. “김규철 CFO(최고재무책임자)는 영상 제작을 전공했고 최호섭 CTO(최고기술경영자)는 아크릴화 페인팅 작업에 일가견이 있었죠. 팀 이름을 ‘툰스토리’로 정하고 C랩 창의개발센터에서 2년 반 동안 동고동락했습니다.”
인공지능이 어떤 상황에서도 그에 맞는 데이터 값을 내놓게 하려면 수십만 번에 걸친 학습이 필요했다. “트위터, 영화자막에 있는 문장을 수집해서 하루에 수 만 건씩 감정을 입력했어요. ‘나를 떠나지 마’라는 문장에 ‘슬픔’을 연결하는 식이었죠.”
◇똥손도 만화를 그릴 수 있도록
삼성전자 입사 10년차인 2019년 11월 퇴사했다. 삼성전자에서 일부 투자금을 받아 같은 해 법인을 설립했다. 이름은 ‘툰스퀘어(toonsquare)’로 바꿨다. 만화(cartoon)와 광장(square)의 합성어다. 아고라에서 수많은 토론이 이뤄졌던 것처럼 만화를 통해 저마다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장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툰스퀘어의 투닝(Tooning)은 텍스트 자동연출(Text to Toon) 인공지능(AI) 기술이 핵심이다. 문장 속 감정을 학습한 인공지능이 사용자의 글에서 감정을 파악해 캐릭터와 이미지를 구현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하고 왔더니 너무 힘들다;;’라고 입력한다고 해보죠. 사용자의 머리 스타일, 턱선, 얼굴형 등을 분석해 만들어진 캐릭터가 땀을 닦으며 헬스장에 서 있는 장면이 자동으로 그려집니다.”
2021년 4월에 열린 국제인공지능대전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글만 쓰면 나를 닮은 캐릭터가 나타나 글의 내용대로 표정을 짓고 행동하는 만화가 화면에 떠오르는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딱딱한 IT기술을 홍보하는 자리에서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어요. 저희 부스 앞에 줄 선 사람들을 보면서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도 자신만의 만화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더욱 굳혔습니다.”
현재 투닝은 베타 버전으로 공개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경우의 수를 더하고 에러를 줄인 정식 버전은 올해 9월 출시를 앞두고 있다. 월 1만2000원의 구독료를 내면 그림을 무제한으로 만들 수 있는 방식이다. “이미 10개 이상의 학교에서 연간결제 방식으로 돈을 내고 투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그랬던 것처럼 투닝을 사용하는 아이들이 그림을 보고 두근거림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1%의 기쁨을 99%와 나누고파
툰스퀘어를 창업한 지 만 2년이 다 돼간다. 2년 동안 이 대표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시간표다. “정식 출시까지 6개월이면 될 줄 알았어요. 삼성전자 C랩에서 이미 2년 반 동안 연구했고 삼성전자 임원들에게도 좋은 평을 받았다는 이유로 패기가 너무 넘쳤던 거죠.”
6개월이 지나도 뚜렷한 성과가 나오지 않으니 자신감이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2년이라는 마라톤을 100미터 달리기하듯 전력 질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체력 안배가 안 돼 쉽게 지치고 일의 효율이 떨어졌죠. 창업을 준비하는 분이라면 장기전을 준비하시라 당부하고 싶습니다.”
창작의 감동을 모든 사람이 느끼길 바라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1%의 예술가뿐 아니라 99%의 대중들이 창작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직접 그린 그림을 볼 때마다 짜릿함을 느껴요.”
그는 자신이 안정과 성장 중 어느 것을 더 갈망하는지 잘 비교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안정과 성장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순 없어요. 누군가는 안정적인 대기업을 포기하고 야생으로 나온 저를 보고 혀를 끌끌 찰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성장’을 택한 것뿐이에요. 스타트업만큼 매일 성장하는 기분을 누릴 수 있는 곳은 없을 거예요.”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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