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자금조달 돕는 스타트업 창업기
창업 기업은 한 번 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에게 코로나19는 가혹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위기가 되고 있다. 매출이 나도 수금까지 시차가 있어, 그 기간 인건비나 임대료 등의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해 ‘흑자도산’한 기업이 적지 않다.
금융 사각지대에 놓인 중소기업을 위한 핀테크 스타트업이 있다. 기업 간(B2B) 금융 직거래 플랫폼을 운영하는 '핀투비'는 중소기업이 매출채권(제품 판매 대금을 일정 기간 후 받겠다고 약정한 증서)을 보다 편리하게 현금화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플랫폼을 운영한다. 서울대를 나와 보스턴컨설팅그룹을 거친 ‘엘리트’ 박상순 대표에게 금융 소외계층을 돕는 서비스 창업기를 들었다.
◇경제학자 꿈꾼 서울대생이 컨설팅 회사 택한 이유
한때 경제학자를 꿈꾸던 청년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88학번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가 그리 잘 살지 않았어요.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학문을 찾다가 경제학을 선택했죠. 교수가 되기 위해 석·박사 진학과 해외 유학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3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계획을 변경했습니다. 1995년 한 대기업 산하 경제연구소의 애널리스트로 취업했어요. 거시경제 동향을 분석하고 전망하는 일이었죠.”
일은 재밌는데 허무했다. 자신의 연구 결과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7년 전략 컨설팅 기업 ‘보스턴컨설팅그룹’(BCG그룹)으로 적을 옮겼다. 맡은 기업의 경영을 진단하고 위기 관리를 하면서, 운영 결과를 바로 볼 수 있어 좋았다. “일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금융사를 전담한 덕에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금융 회사의 성장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죠.”
박 대표가 제안한 시스템을 기업이 수용하고 다른 기업이 벤치마킹까지 할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했다. "은행 창구의 원스톱 서비스, 고액자산가를 대상으로 하는 은행 증권 연계형 자산관리 서비스, 은행과 증권사의 기업 금융 통합 서비스 등이 제가 제안한 시스템이었습니다."
미국 시카고 MBA를 다녀온 후 BCG그룹의 금융부문 총괄파트너로 승진하면서 커리어 전성기를 맞았다. 안주할 수 있었지만 급격히 변하는 세상이 도전 의식을 자극했다. “2010년대 스마트폰이 보급 되면서 세상이 크게 변했어요. 과거에는 발전 단계가 비슷한 국가의 금융사끼리 모이는 경향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선진국과 후진국의 금융사가 한데 모여 디지털 혁신을 논하더라고요.”
금융 디지털화 과정에서 선진국과 후진국 간 차이가 흥미로웠다. “선진국은 오프라인 금융 인프라가 디지털화 발목을 잡는 상황이었어요. 업무 방식을 디지털화하면 영업점을 없애고 구조조정을 해야 하니까요. 반면 오프라인 금융 인프라가 취약한 후진국은 디지털화로 얻을 게 많아 변화 속도가 빨랐어요. 희비가 교차하는 선진국과 후진국을 보며 ‘디지털화는 완전히 새로운 산업 영역에서 빛을 발할 수 있겠구나’ 판단했습니다.”
◇첫 번째 아이템 접고 공금망 금융 사업 시작
2014년 10월, 정부가 인터넷 전문은행을 도입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새로운 영역에 뛰어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같은 해 인터넷 전문 은행을 추진하는 주주들의 컨소시엄인 ‘DBK파트너스’를 설립했다.
“중국 알리바바 산하 인터넷 은행 ‘마이뱅크’처럼 커머스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 전문 은행을 설립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특별법이 만들어져서 인터넷 은행에는 은산분리(산업자본은 의결권 있는 은행 지분을 4%까지만 보유할 수 있도록 제한한 규정) 규정이 적용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2015년 은행법 개정안이 국회 정무위원회 문턱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금융기관이 인터넷 은행의 대주주가 돼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아 이 사업을 접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금융에 기술을 접목할 만한 영역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봤다.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들의 고충이 문득 떠올랐다. “BCG그룹에서 17년 간 컨설팅을 할 때, 중소기업을 공략하기 가장 어려웠습니다. 대기업보다 리스크는 높은데 채산성은 떨어지거든요. 예컨대, 중소기업의 재무제표는 신뢰도가 부족해 이걸 기반으로 신용평가를 하기엔 역부족이에요. 수도권에 밀집된 대기업과는 달리 중소기업은 전국 방방곡곡 흩어져 있어 중소기업 대상 영업은 투입 대비 아웃풋이 낮은 편에 속하고요. 여러모로 중소기업은 금융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죠.”
중소기업의 신용도를 높일 방법을 찾기 위해 중소기업의 유동성 흐름을 살폈다. “A 대기업의 휴대폰에 중소기업이 공급한 카메라가 들어간다고 가정해봐요. 1차 벤더는 2차 벤더로부터 부품을 받아 카메라를 만들죠. 그 사슬은 3차, 그 이하로도 이어집니다. 공급망이 대기업, 1차 벤더, 2차 벤더, 3차 벤더 등으로 복잡하게 구성돼 있는 거죠. 이 구조에서 벤더사들은 자금이 부족할 때, 대기업으로부터 추후 대금을 지급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담보로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게 됩니다.”
공급망 금융에 주목하기로 했다. “공급망 금융이란 공급자(중소 벤더사)가 아닌 구매자(대기업)의 신용으로 공급자에게 현금을 빌려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급자가 자금 조달 수단으로 활용할 만한 자산으로 ‘매출채권’을 꼽을 수 있어요.”
◇국내 사업 철수하고 베트남 시장에 뛰어든 까닭
문제는 기존 체계 하에서는 공급망 금융이 활성화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A 기업이 1000개의 협력 업체를 대상으로 매달 매출채권을 10개 씩 발행할 경우, 전체 매출채권의 양은 월 1만개에 달하게 됩니다. 이걸 일일이 관리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어요. A 기업에서 매출채권을 발행하는 시스템 정보를 받아서 하나씩 은행 대출 시스템에 연동해야 하는 식이죠. 매출채권 별로 대출관리가 이뤄져야 하니까요. 매출채권의 소유권이 제3자에게 넘어갈 경우 일은 더 복잡해집니다.”
매출채권 처리 과정을 효율화 하는 데 방점을 두기로 했다. “대기업으로부터 벤더사의 정보를 받아 이를 통합한 플랫폼을 만들기로 했어요.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고객 유치 비용을 줄이면서 영업할 수 있을테니까요.”
2017년 ‘매출채권 할인 플랫폼’을 국내에 도입했다. “중소기업이 매출채권을 담보로 현금을 받을 때 통상 3.5%의 할인율이 적용됩니다. 대기업에 납품하고 40일 후 100원을 받기로 한 중소기업이 있다면, 당장 99.6원을 받는 대신 '나중에 100원 받을 권리'를 은행에 넘기는 것이죠. 저희는 투자자들을 모아 중소기업의 매출채권을 은행 대신 매입하면서 할인율을 최대한으로 낮췄습니다. 중소기업의 자금 조달 부담을 줄인거죠.”
플랫폼을 출시하면서 기대가 컸는데, 예상과 달리 시장 반응이 미미했다. “우량 기업 대상으로는 이런 서비스가 이미 갖춰진 상태였어요. 규모가 작은 기업을 대상으로 눈을 돌렸는데 과정이 만만치 않았어요. 협력업체를 가입하게 만드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유동성을 공급할 제2금융권과 제휴도 맺었는데,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너무 높은 수준의 금리를 요구했죠.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탈출할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국내 정착 후 진행할 계획이었던 해외 사업을 앞당기기로 했다. “직접 베트남으로 달려갔어요. 금융기관 관계자, 기업 관계자를 두루 만났죠. 이곳에서는 우량 대기업 조차도 매출채권을 수기로 관리하더라고요. ‘이건 기회야, 빨리 선점하자’는 생각에 베트남 진출을 결심했습니다.”
현지 규제와 법률체계를 준수하면서 플랫폼을 개발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어렵사리 2019년 베트남에서 매출채권 할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금융기관이 기존에 보유한 정보를 저희 플랫폼에 연동해 이용할 수 있어요.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구매기업에서 받은 매출채권과 협력업체 정보, 국세청 전자세금계산서 정보 등을 통해 진위여부를 자동으로 판별해줘요. 매출채권 등록, 결제, 할인 약정 및 실행 모든 과정을 플랫폼 내에서 할 수 있습니다.”
핀투비의 매출채권 할인서비스는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벤더들의 고민도 해결해줬다. “B 마스크 제조사가 C, D 마트에 제품을 납품하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C마트는 E은행, F은행과 각각 약정했고, D마트는 G은행과 약정한 상태에요. 이 경우 B 마스크 제조사가 우리 플랫폼에 접속하면 C, D 마트의 모든 매출채권을 조회할 수 있어요. 그 중에서 가장 조건이 좋은 걸 고르기만 하면 됩니다.”
주 수입원은 금융기관이 지급하는 플랫폼 이용료다. 금융기관 입장에선 매달 서비스 이용료만 내면 되니 서비스 구축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서비스의 주요 이용자는 베트남에 있는 국내 금융기관이다. 최근에는 인도네시아와 인도까지 진출했다.
◇아시아 대표 공급망 핀테크 기업 목표
한국 사회에서 선망 받는 학벌과 경력을 자랑하는 그에게도 창업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오랜 기간 경영 컨설팅 일을 했으니 사업도 잘할 줄 알았어요. 전혀 그렇지 않더라고요. 무에서 유를 만드는데다 해외에서 사업을 하는 바람에 시간 지체도 감내해야 하니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도 잘 버틴 덕에 성과가 나오고 있다.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이 개최한 6월 디데이(창업경진대회)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올해 매출 10억원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가장 큰 성과는 동료예요. 5명에서 시작한 핀투비가 지금은 20명 규모의 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아시아 대표 공급망 금융 전문 핀테크 기업이 되는 것이 목표다. “당분간은 베트남 현지화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현지 진출한 국내 금융사 뿐만 아니라 현지 금융사까지 두루 섭렵할 계획이에요. 고객사를 충분히 유치하면 기업간 결제 프로세스를 모두 관리하는 플랫폼으로 거듭나고 싶어요. 매출채권을 일종의 화폐처럼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거죠.
한국 시장에도 재도전할 계획이다. “디지털 자산화한 매출채권을 발행해서 유통하려 합니다.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매출채권을 발행하면 이력관리가 용이하거든요. 관련 특허도 냈고 금융위원회의 혁신금융샌드박스 신청도 준비 중입니다. 이를 토대로 국내에서 답보상태인 매출채권 할인 시장을 활성화 하고 싶어요.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싶습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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