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스타킹 나왔던 로봇 천재 대학생이 끝내 개발한 것

더 비비드 2024. 6. 19. 14:43
모듈형 로봇 셰프 ‘큐브’ 개발한 로닉 오진환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모듈형 로봇 셰프 ‘큐브’ 개발한 로닉 오진환 대표. /더비비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2020년. 손님이 줄어 문을 닫은 식당이 있는가 하면 뜻밖의 인력난에 시달린 곳도 있다. 비대면 포장·배달 주문 비중이 큰 프랜차이즈 식당이 대표적이다. 해당 점주는 ‘주문량은 늘었지만 재료 손질, 포장 등을 맡아줄 일손이 부족하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SKT에서 로봇 개발자로 일하던 오진환 로닉 대표(34)도 그 자리에 있었다. 서빙 로봇의 소프트웨어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키오스크, 서빙 로봇 그다음은 조리 로봇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봤다. 단, 기존 조리 로봇과는 달라야 했다. 그렇게 고안한 게 팔 없는 조리 로봇이다. 오 대표를 만나 ‘팔 없이 요리하는 로봇’의 탄생 비화를 들었다.

◇로봇의 미래를 고민한 결과

2010 대한민국로봇대전 휴머노이드 부문 대상을 받았다. /오진환 대표 제공

고등학교 과학반에서 처음 로봇을 접했다. 공부 체질은 영 아니었다. “공부하기 싫은 마음에 야간자율학습 시간마다 과학반으로 도망치곤 했어요. 과학반에서 집중해서 뭔가 만들고 있으면 선생님도 혼내지 않으셨거든요. 다행히 손재주가 있는 편이라 과학상자를 옆에 끼고 살았죠. 학교 대표로 로봇 대회에 나가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2009년 광운대 로봇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도 로봇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지능형 로봇, 휴머노이드, 배틀 로봇 등 다양한 종류의 로봇 중에서 휴머노이드 로봇을 주로 다뤘죠. 친구들과 함께 소형 2족 보행 로봇을 만들어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로봇경진대회에 출품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SBS ‘스타킹’에도 출연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경험이었죠."

대학 시절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로 유명세를 타 SBS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SBS ‘스타킹’ 캡처

대학 졸업과 함께 SKT R&D 센터에 입사했다. “2015년 당시는 인터렉션(상호작용) 로봇이 이제 막 개발된 시기였어요. ‘밥 먹었니?’ 정도의 단순한 대화 수준이었죠. 임베디드 소프트웨어(전자기기가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미리 내장시키는 소프트웨어) 개발이 주된 업무였습니다.”

기획·개발·양산까지 도맡아 3년 만에 코딩 교육 로봇 ‘알버트’를 출시했다. “출시 가격이 16만원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코딩을 공부하는 학생이 대화 방식으로 궁금한 부분을 바로바로 해결할 수 있도록 했죠. 처음엔 반응이 미지근했는데 2021년엔 1만대 넘게 판매했습니다. 수요보다 공급이 빨랐던 모양이에요.”

SKT 재직시절 로봇 연구를 담당하며 MWC(Mobile World Congress)에도 참가했다. /KBS 뉴스 캡처, 오진환 대표 제공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자리 시장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대면이 필요한 일들을 로봇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SKT는 발 빠르게 ‘서빙 로봇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하드웨어는 다른 제조사에 맡기고 우리 팀은 소프트웨어 개발을 했는데요. 로봇이 문제 없이 잘 돌아다니게 하려면 현장을 잘 이해해야 했습니다. 근무일의 절반은 서울 도심 곳곳의 식당으로 출근했죠.”

외근은 고됐다. 그만큼 배울 점도 많았다. “로봇의 미래가 늘 궁금했거든요. ‘키오스크, 서빙 로봇, 그 다음은 뭘까?’ 같은 생각을 하다 보니 결국은 ‘조리 로봇’이 필요하겠다는 결론에 다다랐죠. 실제로 식당 사장님들이 입버릇처럼 ‘부엌 조리 보조 인력 구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조리 로봇을 만드는 스타트업이 등장해 인기를 끌고 있더군요. ‘나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창업을 결심했어요.”

◇팔이 없는 로봇이어야 하는 이유

(왼쪽부터) 윤정민 전략기획실장, 오진환 대표, 정재우 개발자. /더비비드

2022년 조리 로봇 전문 스타트업 ‘로닉’을 설립했다. 로닉은 로봇에 열정을 다해 몰두한다(nik)는 뜻이다. 로봇의 콘셉트는 명확했다. ‘팔’이 없을 것. “팔이 있는 조리 로봇은 ‘이동’ 그 이상의 기능은 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어요. 보기엔 신기하겠지만 실질적으로 조리 과정의 효율화를 이끌어내진 못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팔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을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도 스타트업 입장에선 부담이었죠.”

모듈형 조리 로봇을 고안했다. “육면체의 모듈에 조리 기능을 하나씩 넣어 연결하자는 아이디어였어요. 테스트용 키트를 만들면서 실험을 거듭했죠. 키트 한 번에 족히 2000만~3000만원은 투입해야 했습니다. 비용을 줄이려고 레고 장난감을 활용해 보기도 했어요. 준비한 식재료를 아래로 떨어뜨리는 부분의 부품 하나만 7~8번 개량했습니다.”

로봇 셰프 큐브가 샐러드를 만드는 모습. 한 그릇에 25초면 충분하다. /로닉

차가운 음식, 따뜻한 음식으로 단계를 나눴다. 차갑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샐러드 조리에 먼저 도전했다. “식재료마다 특성이 다르다는 점이 가장 절 어렵게 했습니다. 가령 치커리는 시간이 지나도 단단한 편이고, 로메인은 빨리 숨이 죽는 편인데요. ‘야채’로 정의한 알고리즘으로는 똑같이 개량되지 않더군요. 재료마다 정의를 달리하고 중량 등을 측정하는 센서를 활용하면서 오차를 줄여나갔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로봇 셰프 ‘큐브’를 완성했다. 가로·세로 각각 80㎝에 높이 1m인 육면체의 모듈형태다. 포장 용기 투하, 재료 투입 등 단계마다 모듈을 이어붙여 조리를 자동화할 수 있다. “이렇게 말로만 설명하니 귀담아 들어 주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어요. ‘현장에서 정말 잘 작동하겠냐’는 의문을 제기하거나 ‘활용 사례를 보여달라’는 요청이 이어졌죠. 실제 적용 사례를 만드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2023년 9월 성수동에 그릭요거트를 만드는 큐브를 만들어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로닉

2023년 5월 경일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큐브를 처음 선보였다. 모듈 6개를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5시간 만에 설치를 마쳤다. “아이패드를 키오스크처럼 설치해 주문을 받았고 20초에 샐러드를 한 그릇씩 만들었습니다. 위생적이고 청결하다는 점을 가장 높게 평가하더군요.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었습니다. 각자 선택한 재료에 따라 영양성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종이로 뽑아주면 좋겠다는 피드백이 있었어요.”

4개월 뒤 성수동에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이번엔 그릭요거트였습니다. 경일대 학생들에게 받은 조언을 바로 반영해 영양 성분표를 함께 제공했죠. 모듈 설치 시간도 2시간 이내로 단축했어요. 이어서 현대 백화점 팝업스토어에선 식품관이 아닌 사실상 맨땅에 큐브를 설치했는데요. 어떤 환경에서도 큐브만으로 조리 시설을 갖출 수 있다는 강점을 재확인했죠."

◇큐브로 바꾸는 세상

큐브 앞에서 신기한 듯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로닉

고객사와 미팅할 때마다 늘 비슷한 질문을 듣는다. 설치비용에 대해서다. “로봇 팔 한 대에 3000만~4000만원을 호가합니다. 큐브는 모듈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모듈 하나에 1000만~2000만원으로 절반 가격입니다. 모듈 2개를 조합한 ‘소규모 매장 타입’의 경우 월 200만원으로 렌탈할 수 있어요. 모듈 하나에 50만원 정도로 더 추가할 수도 있죠.”

설치 규모가 클수록 큐브 도입 시 비용 절감 효과도 커진다. “일반 샐러드 매장에서 2~3명의 직원이 샐러드 한 그릇당 평균 2분, 시간당 최대 100그릇을 만들어 내는데요. 큐브는 개인 맞춤형 샐러드를 한 그릇 당 평균 25초, 시간당 200그릇 이상 만듭니다. 200만원 수준으로 3명의 인건비 약 1200만원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오 대표가 아이패드를 가리키며 맞춤형 샐러드 주문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더비비드

지난 1월엔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가 주최한 디데이 본선에 진출해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다양한 식품 업계에서 큐브를 찾고 있다. “매드포갈릭, TFIG 등을 운영하는 엠에프지코리아와 2024년 내로 매장 오픈을 준비 중입니다. 리조트나 아파트를 짓는 대형 건설사, 프랜차이즈 카페, 컵 과일 납품 공장에서도 러브콜을 받았어요. 로봇은 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수출도 유리하죠. 머지 않아 미국 뉴욕 거리 한복판에서 비빔밥을 판매할지도 모릅니다. 큐브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어디에서든 가능한 일이죠.”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