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연대 출신이 '한 눈에 반해' 공공기관 사표 내고 선택한 뜻밖의 일68

저 직업은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저 일을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궁금한 일이 있으셨나요. 직업별 궁금증을 해소하는 ‘그 일이 알고 싶다’ 시리즈. 이번 편에선 기업 CCO가 하는 일을 소개합니다.

위워크 서울스퀘어에서 만난 핀즐 하민철 CCO /더비비드

카페나 회사에 걸려있는 그림, 옷에 그려진 삽화 등. 주변을 둘러 보면 생각보다 쉽게 예술 작품이 널려 있다. 큐레이터(Curator) 역시 미술관과 박물관에만 존재하는 고고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림 판매 플랫폼 ‘핀즐’의 하민철(33) 큐레이터는 자신을 ‘예술 작품을 쉽고 다양하게 소개할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이라 소개했다. 큐레이터로서 작가 섭외, 작품 소개를 담당하고, 최고융합책임자 (CCO, Chief Curatorial Officer)로서 다른 기업과의 협업도 진행한다. 하민철 CCO를 만나 플랫폼 서비스의 큐레이터가 된 사연을 물었다.

◇북 토크쇼에서 한눈에 반한 그 사업

다양한 화풍을 소개한다. /핀즐 제공

2017년 9월 설립한 ‘핀즐’은 국내외 작가들을 섭외해, 그림 정기구독 서비스와 한정판 작품을 선보이는 스타트업이다.

‘예술을 쉽고 친근하게 접하자’는 취지로 시작한 ‘그림 정기구독’ 서비스는 1500명의 구독자를 확보하며 입지를 다지고 있다. 정기구독을 신청하면 매달 A1 크기의 작품(인쇄된 포스터 형식)과 작품 감상을 돕는 ‘에디터스 레터(Editor’s Letter)’를 배송해준다. 구독료는 월 1만9800원이며, 6개월 치를 한 번에 결제하는 방식이다.

작년부터는 작가와의 독점 계약을 통한 한정판 작품도 판매하고 있다. 세계 각지 40여명의 작가들과 손잡고 일러스트와 사진, 회화 등 다양한 화풍을 소개한다.

하 CCO가 핀즐을 처음 알게 된 북 토크쇼 현장. /본인 제공

핀즐의 CCO 하민철 큐레이터는 그림같은 유년기를 보냈다. 책장 가득 예술 관련 책에 둘러싸여 살았고, 부모님 손을 잡고 전시회를 다니며 미술에 흥미를 붙였다. 고등학생 땐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차는 것보다 책과 함께 사색을 즐겼다. 2007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들어 갔고, 5년 뒤엔 서울대학교에서 미학(미술이론 전공) 석사 과정을 밟았다.

-큐레이터를 꿈꾸게 된 계기가 뭔가요.

"대중들이 스스로 예술에 대한 진입 장벽을 높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자들만 즐기는 고상한 취미 정도로 인식되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사실 전공자의 눈으로 봐도 예술이 재미없을 때가 있는데, 비전공자는 더욱 난해하게 느끼는 게 당연합니다. 자연스레 예술을 쉽게 풀어서 알리는 일을 꿈꾸게 됐습니다. 관련 지식이 없어도 미술을 즐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달까요. 2015년 석사 수료 후,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등에서 전시 기획을 담당했어요. 다만 꿈꿨던 일과는 달랐습니다. 작품을 유명 작가 순으로 배치할지, 이름 순으로 배치할지를 고민하는 등, ‘쉽게 예술 하기’라는 꿈과는 거리가 멀어 아쉬움이 있었죠.”

-어떻게 핀즐에 합류하게 됐나요.

“2018년 초, 한 서점에서 열린 행사에서 핀즐의 존재를 알게 됐어요. 6개월 된 신생 기업이었죠. 진준화 대표님이 그림 정기구독에 대해 설명했는데, ‘예술에 편하게 접근한다’는 점이 제 가치관과 맞았어요. 얼마나 유명한지를 보는 게 아니라, 직접 찾아가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지 얘기를 들어보는 작가 선택 방식도 마음에 들더군요. 이거야말로 예술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이겠다 싶었죠.”

◇거창한 예술이 아닌 일상 속 예술을 위해

한 공원에서 에디터스 레터를 작성 중인 하 CCO. /본인 제공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서점 행사가 끝난 후, 대표에게 이력서를 보냈다. 2018년 여름부터 객원 에디터로 활동하다, 2019년 2월 CCO로 합류했다.

-어떤 일을 하나요.

“객원 에디터 때부터 매달 구독자들에게 그림과 함께 보내는 ‘에디터스 레터’를 써왔어요. 거창한 비평문이 아닌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되는 편지죠. 예를 들어 쓸쓸한 느낌이 나는 그림을 소개할 때 ‘작가가 고독함을 염두하고 그렸다’는 표현보다는 ‘당신도 가을의 쓸쓸함이 느껴지나요’라고 씁니다. 함께 즐기면 좋을 차(tea)도 추천하곤 하죠.

디캠프 사무실에 걸려 있는 유니콘 그림. /핀즐 홈페이지 캡처

작가를 섭외하고 작품을 선정하는 것도 큐레이터의 몫이에요. 외부 기관의 협업 요청을 받아 특정 공간에 어울리는 작품을 고르기도 하죠. 스타트업 공유 사무실인 디캠프와 프론트원에서도 의뢰를 받아 핀즐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걸었어요.  ‘혁신가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특성을 살려 유니콘이 그려진 그림을 골랐습니다.”

-작품 선정 기준이 궁금합니다.

“재산 축적의 용도가 아닌 정말 집에 걸어두고 싶은 그림을 골라요. 곁에 두고 매일 보고 싶은 그림을 찾죠.  최대한 다양한 화풍을 소개하려 해요. 그림 정기구독으로 발송하는 그림의 경우에는 계절, 사회적 이슈를 고려합니다. 연말이면 따뜻한 느낌의 그림을 보내는 식이죠. 개인적으로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가 아닌,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을 선호합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작품 감상의 묘미에요.”

핀즐에서 활동 중인 프랑스 작가 세브린 아수와 그의 작품. /핀즐 제공

-작가 섭외 과정에서 느낀 점이 있나요.

“핀즐이 아니면 한국에 알려질 기회가 없던 해외 작가들을 섭외할 때 뿌듯합니다. 자국에서는 활발하게 활동하지만, 다른 나라는 미처 고려하지 못하던 해외 작가들을 섭외해요. 대부분 흔쾌히 계약서에 도장을 찍습니다. 프랑스 작가 ‘세브린 아수’와 일본 작가 ‘타쿠 반나이’가 대표적 사례에요. 자신의 작품이 한국에서 호응을 얻을지 몰랐다며 놀라더군요. 한국의 소비자들은 이전에 본 적 없던 새로운 작품들을 접하는 기회가 되니 모두가 좋습니다.”

◇입문자를 넘어 수집가까지 겨냥

핀즐의 '12 리미티드 에디션' 작품 중 하나를 들고 웃고 있는 하 CCO. /더비비드

2019년 말, 핀즐의 큐레이터로 한 해를 보낸 후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정기구독을 넘어, 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서비스를 찾는 소비자들이 나온 것이다.

-소비자 반응의 이유가 뭔가요.

"의외로 소비자들이 취향을 찾는 속도가 빠르더군요. 6개월간 그림 정기구독을 이용한 소비자 중 3분의 1 정도가 구독을 종료해요. 이유를 물었더니 대부분 ‘이제 취향이 생겨 직접 작품을 고르고 싶어졌다’는 답변이 돌아왔죠. 미처 예상치 못한 지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떠올린 대안이 뭔가요.

“이용자들의 늘어난 관심을 핀즐 안에서 해소하게끔 하고 싶었어요. 정기구독으로 배송되는 그림은 지관통에 담긴 포스터예요. 매달 새로운 느낌을 연출할 순 있지만 그림을 오래 소장할 수는 없죠.  첫 몇 달 간 다양한 그림을 접해 취향을 파악한 후, 작품 소장으로 넘어가는 구조를 떠올렸어요. 핀즐은 구독자뿐 아니라 구매자도 유치할 수 있고, 소비자는 구독 그림보다 질 좋은 작품을 소장할 수 있어 윈윈(win-win)하는 소비 구조죠.”

‘갤러리아 VIP 라운지 초청 전시’와 ‘갤러리아 백화점 팝업 전시’에서도 핀즐의 작품을 선보였다. /핀즐 제공

2020년 1월, 전세계에서 12점만 발행되는 작품이라는 뜻의 ‘12 리미티드 에디션’을 선보였다. 작가들과 12점만 발행하기로 독점 계약도 맺었다. 구독자 수에 맞춰 무제한으로 발행 가능한 기존의 정기구독 작품과 다른 방식이다.

-정기구독 서비스와 리미티드 에디션의 구체적인 차이가 궁금합니다.

“정기구독이 예술을 알아가는 목적을 가진 소비자를 위한 것이라면, 리미티드 에디션은 작품 수집까지 생각하는 분들을 위한 서비스에요. 작품의 질도 다르죠. 그림과 액자가 분리돼있던 정기구독 그림과 달리 일체형이고 종이도 고급 소재예요. 알루미늄판에 아크릴로 압착 코팅을 했죠. 액자 뒤편에는 12점 중 몇 번째 작품인지 번호를 기재했습니다. 가격은 한 점에 20만~30만원이에요. 그림 정기구독이 한 달에 2만원 정도인 걸 고려하면 고가인 편이죠."

증강현실 기술을 이용해 원하는 위치에 작품을 뒀을 때 어떨지 미리 확인할 수 있다. /핀즐 제공

-리미티드 에디션 출시 후 반응은요.

“현재 ‘12 리미티드 에디션’에 667개의 작품이 등록돼있습니다. 다양한 국적의 작가 30명과 독점 계약을 맺었죠. 출시 1년 만에 3000명이 한정판 작품을 구매했습니다. 가격도 원화(복사, 복제의 바탕이 되는 그림)에 비해 부담스럽지 않고, 선택의 폭도 넓어 호응을 받은 것 같아요. 유행을 타는 작품들이 아니라, 여기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그림이 많은 것도 장점이죠. 덕분에 그림 수집의 첫 단추를 핀즐에서 끼우는 분이 많아요.”

-앞으로 목표는요.

“초심자가 예술을 자기만의 안목으로 즐길 때까지 계단을 제공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 생각해요. 핀즐을 통해서 ‘예술이 가까운 삶’을 즐기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더 좋은 작품을 찾아내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해야죠. 요즘 뜨고 있는 NFT(Non-Fungible Token, 희소성을 갖는 디지털 자산) 형식의 작품도 선보일 예정입니다.”

-플랫폼 회사의 큐레이터, 후회는 없나요.

“더 많은 사람을 예술가로 여기게 됐어요. 이전에 미술관에서 일할 때는 명성 있는 작가의 작품만 다뤘지만, 여기서는 다양성을 중시하니까요. 전세계 곳곳에 많은 작가들이 예술품을 만들고 있고, 그걸 소개할 방법이 전시회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현장에서 느꼈습니다. 다양하고 친근하게 예술을 소개하고 있는 점이 만족스럽습니다. 지금 다시 그 서점으로 돌아간다 해도 대표님의 명함을 받아 올 것 같네요.”

/장강 에디터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