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초 벽 공유 플랫폼 개발기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스트리트 아트는 ‘음지의 작품’이란 인식이 있다. 하룻밤 사이 사라지는 일도 비일비재해 작품성을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도 적다.
이프비주식회사는 스트리트 아트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렸다. 스트리트 아트를 상업 광고, 케이팝 스타 같은 주류 영역에 접목해 벽을 새로운 플랫폼으로 활용하는 중이다. 기업에게는 신규 광고 창구를, 건물주에게는 새로운 수익 창출 기회를, 아티스트에게는 일감을 제공한다. 이프비주식회사의 한종혁(36) 대표를 만나 벽에 주목한 이유를 들었다.
◇세계정복 꿈꾼 창업 꿈나무가 뉴욕에서 발견한 것
이프비주식회사는 벽 공유 플랫폼 월디(WALLD)를 운영한다. 월디는 광고주에게 광고 제작 의뢰를 받은 뒤 건물주로부터 승인받은 벽을 옥외 광고판으로 활용하는 비즈니스다. 벽에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와는 수익을 공유한다. 방치된 벽의 가치를 복원하거나 노후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부산의 BTS 벽화, 춘천 손흥민 벽화, 홍철책빵 노홍철 벽화 등으로 이름을 알렸다. SK가스, 마리메꼬, 알렉산더 맥퀸, 무신사, 현대자동차, 서울시 등 다양한 클라이언트가 월디를 찾았다.
아이디어 노트를 들고 다니던 창업 꿈나무였다. 2005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세계정복을 꿈꿨어요. 전쟁 같은 무력 수단 대신 아이디어로 세계를 지배하고 싶었죠.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이 서비스와 기기로 전 세계 소비자를 사로잡은 것 처럼요. 창업만 바라보고 경영학과에 진학해 학점 관리는 안 하고 창업 준비에 집중했어요. ‘글로벌’, ‘국제’ 수식이 붙은 수업이나 타과의 전공 강의를 수강하며 호기심을 채웠죠.”
2011년 미국 뉴욕에서 좋은 기회를 만났다. “어학연수와 여행을 목적으로 떠났는데, 좋은 기회가 생겼어요. 뉴욕에서 한 중년 신사를 도와준 적이 있어요. 답례로 식사 대접을 받게 됐죠. 알고 보니 그분은 뉴욕 한인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어요. 저를 좋게 평가했는지 자기 회사의 마케터로 일해보라고 제안하더라고요.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건축설계회사였어요. 월 급여로 3000달러를 받고, 맨해튼 중심가에 거주하는 '나름' 부유한 인턴으로 살았죠. 고급 취향도 생겼어요. 노후 공간을 재탄생 시키는 일의 가치에 눈 떴고, 도시 곳곳을 채운 그라피티(벽면에 페인트, 스프레이 등으로 낙서처럼 그린 그림)에도 매료됐죠.”
인턴 생활을 마치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450일간 48개국을 다녔다. “뉴욕 생활 이후 공간과 미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커졌어요. 세계 각국의 미술관에서 거장의 작품을 감상했어요. 이름모를 스트리트 아트를 넋놓고 바라본 적도 있죠. ‘작가가 꼭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야 할까.’ 여행을 하며 벽의 가능성을 발견했어요. 2012년 전과 완전 다른 사람이 돼 한국 땅을 밟았죠.”
◇대기업 퇴사 후 첫 창업, 처참한 실패
졸업 후 창업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취업해야 할 사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2013년 포스코에 입사했다가 3개월 후 NHN로 환승 취업했다. “NHN 입사 연수에서 1등을 했어요. 어른들의 눈에 띄어 전략투자팀에 발탁됐죠. 3년 반 동안 스타트업 투자, M&A 등의 업무를 했어요. 훌륭한 직장이었는데 창업이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창업내림’을 거역하니 몸이 아파오더군요. 극심한 스트레스에 호흡곤란까지 와서 2016년 10월 퇴사했습니다.”
휴식기 동안 아이디어 노트에 기록한 것들을 점검했다. 실현 가능성을 계산하며 창업 아이템을 찾아 나섰다. 2017년 8월, 두 개의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유기 동물과 스트리트 아트 관련 아이템이었어요. 슬럼가의 스트리트 아트로 옷을 만들어 수익금을 슬럼가에 환원하는 비즈니스였죠. 이 아이디어로 고용노동부의 소셜벤처 아이디어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받았어요. 그때 처음 투자 제안도 받았죠. ‘대박 나겠다’ 자신감이 차올랐어요.”
2018년 4월, 이프비주식회사 법인을 설립했다. 같은 해 사회적기업 육성사업에 선정됐고, 외부와 협업할 기회도 거머쥐었다. 하지만 일이 원하는 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대기업의 반려동물 앱 서비스에 콘텐츠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는데요. 창의성이 아니라 업체의 입맛에 맞춰서 일하는 저희의 모습을 발견했어요. 점점 흥미를 잃었죠. 유기 동물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고 싶어서 이 비즈니스를 한 것인데, 저희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이 없었어요. 리스크 대비 얻을 수 있는 게 없었죠. 2019년 2월, 유기 동물 사업을 접기로 했어요.”
스트리트 아트 의류 비즈니스도 진전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시제품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디자이너를 세 번이나 교체했어요. 알고 보니 디자이너 문제가 아니었어요. 크게 그려진 스트리트 아트를 몇 뼘 되지 않는 티셔츠 사이즈로 줄인 게 문제였죠. 웅장한 맛에 감상했던 스트리트 아트의 크기를 줄이는 과정에서 매력도 줄어든 거죠. 2019년 9월, 의류 사업도 종료했어요. 사업 개발만 하다가 옷을 단 한 장도 판매하지 못하고 철수하는 참극이 벌어진 셈이죠. 멘탈이 무너졌어요.”
◇스트리트 아트에 상업 광고 접목, 손흥민 벽화로 유명세
다시 아이디어 노트를 펼쳤다. 스트리트 아트 의류 비즈니스를 할 때 이벤트 중 하나로 구상했던 ‘벽화 그리기’가 눈에 들어왔다. “’줄일 수 없으면, 그 크기 그대로 옮기자’가 출발점이었어요. 당시 사무실이 성수동에 있었는데요. 성수동의 벽들이 새롭게 보였어요. 좋은 벽도 너무 많았죠. 2020년 3월, 벽에 스트리트 아트를 접목한 광고를 만드는 일을 해보기로 결심했어요.”
벽을 섭외하는 게 급선무였다. ‘침 바르기 작업’에 들어갔다. “파급 효과가 클 것 같은 벽부터 찾아나섰어요. 성수동, 서울숲 카페거리, 연남동, 한남동 등지에서 150개의 벽을 확보했죠. 벽을 빌려준 건물주에게는 사용 기간 동안 임대료를 주기로 했어요. 건물주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어요. 코로나19 사태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뚝 끊기면서, 입주사와 건물주 모두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부가 수입을 창출하면서 빌려준 건물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대안이 돼 줬죠.”
광고주를 모집하려면 포트폴리오가 필요했다. 실력 있는 아티스트에게 일일이 연락해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2020년 8월, 성수동 대림창고 옆 벽에 첫 벽화를 선보였다. “코로나 종식을 기원하는 내용이었는데요.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어요. 첫 포트폴리오를 알린 후 관심 가는 광고주에게 메일을 보냈더니 한 명도 빠짐없이 답장을 해왔어요. 광고주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진 거죠. 여러 기업과 협의 끝에 OTT 업체 '웨이브'와 패션 업체 '한섬'을 첫 광고주로 받았습니다. 연남동에 가수 겸 배우 아이유를, 신사동 가로수길에는 모델 최소라를 크게 그렸습니다.”
2021년 4월 케이팝 스트리트 아트 서비스를 론칭했다. 팬덤의 요청을 받아 전국 각지의 유휴 벽면에 인기 스타의 얼굴을 그리는 서비스다. “우리나라에는 케이팝과 강력한 팬덤이라는 무기가 있어요. 지방의 노후한 건물벽에 스타의 얼굴을 새겨 랜드마크를 만들면 낙후된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죠. 부산 감천문화마을에 BTS의 정국과 지민을, 전주 한옥마을의 한 카페 벽에 소녀시대 태연을 그렸어요. 그 해 겨울, 축구선수 손흥민과 토트넘 팬클럽의 요청을 받아 춘천의 화로 광장에 손흥민 벽화 작업을 했는데요.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토트넘의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저희 작품이 올라갔죠.”
◇전세계 무대 종합 벽 플랫폼 목표
지금까지 부산, 포항, 광주, 전주, 춘천 등지에서 20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벽에 솜씨를 뽐내는 작가는 60여명으로 늘어났다. 컨스트럭션 아트(construction art. 채색, 질감 등을 달리해 건물 외양을 바꾸는 작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주 수익원은 광고 임대료입니다. 광고주에게 임대료를 가지면 이 중 일부를 건물주에게 주고 나머지를 저희가 가지는 구조죠. 아티스트에게는 작업비를 지급합니다. 광고 작품의 경우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지웁니다. 희소성이 있죠. 지방에서 진행하는 케이팝 아트는 벽을 영구적으로 빌려서 작업합니다.”
벽은 전 세계 어디든 있다. 비즈니스 모델의 확장 가능성을 인정받아 지난 5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이 주최한 창업경진대회(디데이)에서 우승했다. “월디는 남의 것을 광고해 주면서 우리도 알릴 수 있는 비즈니스예요. 작품 하나가 완성되면 SNS에서 알아서 구전되고 광고주들이 찾아오죠. 들어오는 모든 의뢰를 받지는 않고, 일정 기준에 입각해 광고주를 선정합니다. 기준은 단순해요. ‘재미’입니다. 물론 작품이 악영향을 미치거나 논쟁거리가 되면 안 되니까 주류나 담배 광고, 정치 이슈와 맞물리는 광고는 모두 거절했습니다.”
종합 벽 플랫폼을 꿈꾼다. “지금은 벽에 미술을 입히는 작업을 진행 중이지만, 벽을 캔버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추후 벽 청소, 인테리어, 리모델링 등으로 영역을 확장할 계획입니다. 종국적으로는 전 세계의 벽을 거래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아프리카 콩고에 있는 벽을 사서, 콩고 반대편에 있는 기업이 그 벽에 광고를 집행할 수 있는 그런 플랫폼을 꿈꾸죠. 그렇게 세계 정복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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