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LG 사표 던지고, 전남 시골마을로 8시간 차를 달려 깨달은 것

더 비비드 2024. 7. 2. 15:41
지역의 가치를 발굴하는 로컬 브랜딩 스타트업 창업기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김지영 브로콜리컴퍼니 대표 /더비비드

불황이 닥쳐도 샤넬이나 에르메스 같은 명품 매장은 붐빈다. 애플의 신제품이 출시되는 날이면 애플 스토어 앞에 밤샘 대기 행렬이 펼쳐진다. 브랜드의 힘이다.

베테랑 광고기획자 출신인 브로컬리컴퍼니의 김지영 대표(40)는 사회문제도 브랜드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방 소도시의 청년 인구와 소득이 감소하는 ‘지방소멸’ 현상을 브랜딩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김 대표를 만나 공공 문제를 브랜딩으로 해결하는 법에 대해서 들었다.

◇칸 광고제서 수상한 광고인이 퇴사 결심한 이유

브로컬리컴퍼니가 론칭한 화장품 브랜드 나의온도(왼쪽)와 어글리시크(오른쪽). /브로컬리컴퍼니

브로컬리컴퍼니는 지역의 가치 있는 요소를 발굴해 브랜딩하고 상품화하는 스타트업이다. 한때 지역을 상징했지만 사라질 위기에 처했거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받던 소재를 활용해 제품을 만든다.

기초 비건 화장품 브랜드 owndo°(나의온도), 유기농 소비재 브랜드 UGLYCHIC(어글리시크) 등 다양한 브랜드와 제품을 출시했다. 세련되고 현대적인 감각 덕분에 젊은 소비자들에게 반응이 좋다. 나의온도의 경우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2만명이 넘는다.

김 대표는 LG그룹의 광고 계열사 HS애드에서 8년 근무했다. 오른쪽 사진은 마음약방 캠페인을 진행할 때의 모습. /김지영 대표 제공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LG그룹의 광고 계열사 HS애드에서 근무했다. 배달의 민족, LG전자 등 굵직한 광고주의 상업광고를 기획했다. 그에게 광고란 한 브랜드를 성장시키는 과정이었다. 광고로 브랜드 메시지를 전하고 소비자와 소통하는 일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 선망받는 직장을 관둔 계기는요.

“세상을 변화시킬 광고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던 무렵, 회사에서 재능기부 형태로 서울문화재단과 ‘마음약방’이라는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과도한 경쟁, 스트레스, 세월호 트라우마 등으로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는데요. 우울증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가장 가벼운 소재인 자판기에 결합해 캠페인을 집행했어요. 이 캠페인으로 칸 국제광고제 은상을 받았습니다. 광고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영예를 달성한 것이죠. 커리어의 정점을 찍고 나니 아쉬울 게 없었어요. 지역 브랜딩의 매력에 눈 뜨기도 했고요.”

칸 국제광고제 수상 당시의 모습. /김지영 대표 제공

- 결국 퇴사 결정을 내렸네요.

“2018년 초 퇴사하고 영국 런던과 일본 교토로 여행을 떠났어요. 지역 브랜딩을 잘 한 도시들이죠. 반면 한국의 브랜딩은 아쉬운 데가 많았어요. 서울의 이미지는 고궁, 남산타워, 동대문 시장, 강남 정도에 그치죠. 지방은 참담하고요. 고유의 정체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랜차이즈 브랜드가 지역을 뒤덮으면서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요. 지방의 가치를 상기시켜줄 로컬 브랜딩을 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한국의 알프스에서 발견한 것

전남 화순 수만리에서 발견한 구절초와 구절초를 재배하는 구성원들의 모습. /브로컬리컴퍼니

2018년 ‘로컬 브랜딩’ 아이디어로 현대자동차그룹의 투자 프로그램 ‘제로원 액셀러레이터’에 합격했다. 같은 해 4월, 브로컬리컴퍼니 법인을 설립했다.  브랜드(BRAND)와 지역(LOCALLY)의 합성어로 지역 문제를 브랜드로 풀어간다는 이름이다. 2020년 5월 비건 화장품 브랜드 owndo°(나의온도)를 론칭하고 클렌징바, 클렌징폼, 토너, 에센스, 크림 등의 기초화장품을 출시했다.

- 첫 아이템을 발견한 과정이 궁금합니다.

“법인 설립 후 지방 소멸 문제를 겪고 있는 지역을 찾아 나섰는데요. EBS 다큐멘터리를 통해 전라남도 화순의 수만리라는 마을을 알게 됐습니다. 한국의 알프스라 불릴 정도로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마을인데, 구절초라는 꽃이 유명해요. 다만 구절초 수요가 떨어지고, 구절초를 재배할 젊은 인력이 이탈하면서 마을의 수입이 계속 줄고 있는 상황이죠.”

- 다큐멘터리만 보고 결정한 건가요.

“무작정 수만리로 찾아갔습니다. 초행길이라 8시간이나 운전했죠. 아름다운 마을 경관 곳곳에 방치된 빈 땅이 눈에 들어왔어요. 과거에는 구절초 꽃으로 가득했던 땅이라고 하더라고요. 마음이 아팠죠. 흥미로운 건, 그곳에서 대화를 나눈 어르신들의 피부가 모두 좋았다는 점이었어요. 과거 수만리 사람들은 시집가는 딸에게 구절초를 먹였다고 합니다. 피부 항염, 진정 효과가 뛰어나고 혈액순환을 도와 여성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였죠. 논문을 찾아보니 구절초가 이미 화장품 원료로 활용되고 있더군요. 다만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숨은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어요.”

구절초 추출 과정. /브로컬리컴퍼니

- 재료를 먼저 발견하고, 브랜드를 구상한 건가요.

“좋은 효능을 가진 야생초와 소비자의 접접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했어요. 가장 한국적인 비건 화장품으로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구절초라는 원재료를 연구하는 것에서 출발했어요. 브랜드 스토리의 원천은 지역에서 나오니까요. 이장님이나 농가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면서 새 브랜드의 정체성을 설계했어요. 비거니즘(동물성 원료 지양), 친환경이라는 키워드를 설정했죠. 단순히 로컬을 알리는데 집중한다면 특산품에 그칠 우려가 있거든요. 제품에 브랜드를 입히려면 소비행위에 ‘가치’를 더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열성 소비자층을 확보할 수도 있고요.”

- 화장품은 어떻게 제조했나요.

“수만리에서 구절초를 직접 수매한 뒤 전통적인 방식으로 추출물을 만들었습니다. 화장품 조성물 특허도 등록했죠. 제조사에서 이렇게 비싼 제품을 생산하는 건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좋은 성분을 고집했어요. 공정 과정도 복잡했죠.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것 못지않게 제품의 시장성을 높이는 게 중요했거든요. 또한 친환경이라는 브랜드 정체성에 맞게 PCR 플라스틱(재활용 합성수지)을 화장품 용기로 사용했습니다. 원료 조사 720시간, 농가 탐방 1440시간, 원료 검증 2160시간 등 총 4320시간에 걸쳐 나의온도의 화장품이 탄생했죠.”

◇못난이 농산물 200% 활용법

어글리시크는 비품 농산물을 활용해 화장품 등을 만드는 유기농 브랜드다. /브로컬리컴퍼니

2021년 3월, 두번째 브랜드 UGLYCHIC(어글리시크)를 론칭했다. 어글리시크는 못난이 농산물이라고 불리는 ‘비품 농산물’을 활용해 유기농 러브젤, 여성청결제, 선크림 등의 제품을 만드는 브랜드다.

- 어글리시크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농부들과 이야기를 하다 유기농산물 재배 과정이 까다롭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농약 한번 뿌리면 될 걸 석회가루를 뿌리고 방충망을 설치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가며 철칙을 지키는 분들이었죠. 유기농 재배의 생산량은 화학적 생산량의 3분의 1밖에 안 돼요. 그중에서도 벌레가 먹었거나 크기가 너무 크거나 작아서 비품으로 분류되는 게 3분의 1에 달하고요. 비품 대부분은 유통에 한계가 있고 부가가치가 적은 잼이나 주스 형태로 가공됩니다. 못난이 농산물을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으로 재탄생 시키기로 했습니다.”

- 비품의 활용법이 궁금합니다.

“못난이 농산물의 예쁜 내면에 주목했어요. 비품은 양품과 겉모습만 다르고 영양소는 똑같아요. 이를 유용하게 활용할 영역을 찾다가 성인 용품 시장을 떠올렸습니다. 성인 용품 구매자의 80%가 남성일 정도로 이 시장은 남성 중심적이에요. 제형, 사용감도 남성 소비자에게 초점 맞춰져 있었죠. 유기농 원료로 여성친화적인 제품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제주도 유기농 풋귤, 영덕의 유기농 복숭아로 러브젤을, 무주의 사과로 여성청결제를 만들었어요. 이후 샴푸, 선크림 등으로 제품군을 확대했죠.”

지역 농가와 관계를 맺는 모습. /브로컬리컴퍼니

- 지역과 관계 형성하는 게 어렵진 않았나요.

“지금까지 9곳의 로컬과 협업했는데요. 처음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재미로 시작했다가 말겠지’ 생각한 분도 있었어요. 하지만 올해 수확량은 어떤지, 태풍이 들지는 않았는지, 원물의 상태는 어떤지 꾸준히 관심을 기울였더니 좋은 관계로 이어졌어요. 진심이 닿은 것이죠. 지금도 각 지방의 지방자치단체나 기관으로부터 친환경, 유기농 농법을 고수하는 농민이나 지역의 우수한 원재료 공장 등을 추천받아서 인연을 맺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식물성 콜라겐 출시, 해외 진출 목표

브로컬리컴퍼니의 구성원들. /브로컬리컴퍼니, 더비비드

전 직원이 일당백해야 할 정도로 작은 조직이지만 지금까지 많은 성과를 냈다. 올리브영, 롯데면세점 등 주요 판매 채널에 진출했고 홈쇼핑 판매를 준비 중이다. 북미, 독일, 일본과 수출 계약도 체결했다.

- 로컬 발굴, 브랜딩, 제품 개발 전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전 과정이 고난입니다. 1년에 지방을 최소 50번은 오가요. 제품 만드는 과정도 오래 걸리고, 공장 연구원들과 논쟁도 많이 해야 하죠. 하지만 그만큼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 아산나눔재단 등 저희의 취지에 공감해준 다양한 기관의 도움을 받은 덕에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신한금융그룹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주 당근을 활용하는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며, 제주관광공사,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도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은 제주 구좌의 유기농 당근으로 만든 콜라겐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더비비드

- 힘든 만큼 보람도 클 것 같아요.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인정받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농가 분들에게 자신의 생산품으로 만든 제품을 드릴 때도 뿌듯해요. 세련되게 재탄생했다며 좋아하시거든요. 가장 기뻤던 건 제품을 사용한 소비자로부터 ‘화순에 가보고 싶다’는 후기를 받았을 때였어요. 로컬 브랜딩을 하는 이유를 상기시켜 주는 순간이었죠.”

- 앞으로의 계획은요.

“신규 제품에 집중할 계획이에요. 요즘 주력하고 있는 제품은 제주 구좌 유기농 당근으로 만든 당근 콜라겐입니다. 어글리시크 브랜드 제품인데요. 시중에서 보기 힘든 식물성 콜라겐입니다. 제주대학교와 식물성 콜라겐의 유효도(섭취 시 흡수율)를 높이는 공동 연구도 진행 중이죠. 궁극적으로는 보다 많은 소비자에게 저희 제품을 알려서 규모의 경제를 이루고 싶어요. 판매량을 늘려 계약 재배 방식을 도입하면 농가의 소득 증진에 더 큰 보탬이 되지 않을까요. 상생하는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브로컬리의 비전이자 저의 비전입니다.”

/진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