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치료제 개발 기업 ‘웰트’ 창업기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길을 걷다 스마트폰에 알림이 뜬다.
“심근경색 전조증상이 포착됐습니다. 30분 내 급성 심근경색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즉시 응급실에 방문하세요.”
곧바로 인근 병원에 환자의 정보가 전송되고, 쓰러지기 전 제 발로 병원에 방문한 환자는 준비된 처치를 통해 무사히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는 웰트의 강성지(37) 대표가 꿈꾸는 미래 모습이다. 어떻게 질병을 예측할까 싶겠지만, 강 대표는 확신한다.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의대 졸업 후 회사를 세웠고, 디지털 치료제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강성지 대표를 만나 디지털 치료제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미래를 그려가고 있는지 들었다.
◇디지털 치료제(DTx: Digital Therapeutics)란
디지털 치료제(DTx)는 ‘소프트웨어 약’이다. 알약 형태의 1세대 치료제, 백신 등 바이오 의약품인 2세대 치료제를 넘어 3세대 치료제로 불리는 분야다.
스마트폰 앱 등 컴퓨터 프로그램의 형태로, 질병을 예방·관리하고 치료까지 한다. 일반 약처럼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약을 사용할 수 있다.
연구개발도 신약을 만드는 과정과 다를 바 없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의료행위에 대한 수가 체계를 인정받고 식약처의 임상시험 승인을 받으려면, 디지털 치료제의 효능을 입증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진료가 늘면서 관심이 높아졌다. 미국, 일본, 호주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몇몇 디지털 치료제가 앱 형태로 상용화됐다.
웰트는 국내 1세대 디지털 치료제 개발 기업으로 분류된다. 불면증 디지털치료제 ‘필로우Rx’를 개발했다. ‘필로우Rx’는 환자의 생체 정보 데이터를 수집해 맞춤형 수면 스케줄을 제시하는 치료제다. 의사의 처방으로 사용할 수 있고 1세대 의약품과 병행해 사용하는 방식이다.
‘필로우Rx’를 병원 데이터와 연동하면 즉각적인 진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건상 병원에 자주 방문하지 못해도 생체 변화에 따라 실시간으로 의약품이나 투약 횟수를 바꿀 수 있다. 작년 9월 식약처로부터 확증 임상시험을 승인받고 단계별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왜 의사 안 해요?
강 대표는 요즘 유행하는 ‘갓생(God과 生의 합성어로 타의 모범이 되는 부지런한 삶을 의미함)’이란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특이한 이력으로 주목받았다. 2003년 민사고를 조기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3년간 보건복지부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하다 돌연 앱 개발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창업 아이템이 잘 안 풀리자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인턴 생활을 했다.
갑자기 특수 이력을 만든 게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가로등 빛의 투사 범위를 개선하는 아이디어로 학생발명전 대통령상을 받았다. 대학생 때는 과 대표부터 시작해 발명부, 사진반, 풍물패, 학보사 등 여러 동아리를 섭렵했다.
매사에 거침없던 그가 유일하게 주저했던 것이 의대에서 전공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제 관점에서는 아픈 사람이 병원에 찾아오고, 치료받아 귀가하는 것이 도돌이표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사가 사회의 필수인력인 건 맞지만, 사후적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로는 인류의 건강수명을 늘릴 수 없다고 생각했죠. 의사를 왜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지금도 많이 받는데요. 이게 이유입니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어요.”
질병을 미리 막을 방법이 없나 고민하다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때 신종플루가 유행했고 보건복지부 소속 공중보건의 긴급 채용으로 입사했다. “신종플루 감염 역학 조사, 보건 정책 수립, 군중 통계수치를 활용한 질병 분석 등의 일을 했어요. 이 분야에 관심이 생겨 서울대학교 보건학 석사과정에 입학해 의대에선 배울 수 없었던 보건학도 전문적으로 배웠죠.”
의학과 보건학을 모두 공부해보고 깨달은 건 ‘진단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예방과 치료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유전자 검사 기술이 고도화돼 미래에 생길 질병을 미리 알게 되면, 초기 치료로 쉽게 극복이 가능하잖아요. 지금은 학문적으로 분리돼있지만 궁극적 목표는 같다는 것을 깨달았죠.”
◇스마트 벨트 만들다 디지털 치료제 시장 개척
의료기술이 질병을 예측하는 경지까지 오르려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건의 생활을 마치고 2012년 ‘모티브앱’을 세워 첫 창업에 도전했다. “게임 형태의 건강 관리 앱이었어요. 특정 지역까지 걷는 미션을 해결하면 쿠폰을 지급하는 방식이었죠. 앱 사용자에게 동기를 부여해 건강을 관리하고, 데이터를 수집해 의료 산업에서 활용할 생각이었죠. 1년 반 정도 했지만 잘 안됐습니다. 동기부여를 할 기제가 약했고, 수익 모델을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었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인턴 생활을 하다 2014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에 입사했다. “사내에서 ‘삼성 헬스’ 앱을 고도화하는 중이라 의대 출신의 전문 인력이 필요했어요. 지인이 ‘의사라는 직업에 크게 관심 없고, 보건복지부와 앱 개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며 저를 추천했고 면접을 보고 입사하게 됐죠.”
디지털 시계에 탑재된 생체 정보 수집 센서로 앱을 만들다 하드웨어를 하나 더 개발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마트 벨트’ 아이디어로 사내 창업경진대회 씨랩(C-lab)에 지원해 육성 기업으로 선정됐다. “2년 만에 또 창업하게 됐어요. 오늘날 웰트의 모태죠. 일반적인 가죽 벨트와 똑같이 생겼는데, 활동 시간, 걸음걸이, 복부 둘레 등을 측정해 앱과 연동하고 건강정보를 기록하는 제품이었어요. 빈폴, 몽블랑 등 다양한 패션브랜드와 협업할 정도로 사업이 주목받았지만, 소비자가 충전을 계속 하지 않으면 지속적인 정보 수집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템이었어요.”
2018년부터 하드웨어 사업에서 소프트웨어 개발로 무게추를 옮겼다. “처음엔 소비자들이 벨트를 충전하게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소프트웨어에 기능을 추가해 상품성을 높일 생각이었어요. 시장 조사를 해보니 당시 해외에선 디지털 치료제가 주목받고 있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스마트 벨트는 건강 정보를 수집하는 보조 기구일 뿐이었어요. 벨트로 신체 정보를 수집하고 앱으로 운동을 권하는 게 ‘건강기능식품’이라면, 디지털 치료제는 진짜 의약품이었죠.
벨트 사업을 접어두고 디지털 치료제 시장을 개척하기로 했다. 당시 국내에선 디지털 치료제에 대한 법규, 보건복지부 가이드라인 등 규제 자체가 전무한 상황이었다. “2018년 미국에서 ‘페어테라퓨틱스’라는 회사가 마약중독 디지털 치료제의 판매 승인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했어요. 무작정 미국 페어테라퓨틱스 본사로 떠났죠. 1년 동안 업계 실무자를 만나 시장 진출에 대한 조언을 구했어요. 노력 끝에 2020년엔 웰트도 국제 디지털 치료협회(DTA)에 가입하게 됐습니다. 이후 미국의 디지털 치료제 산업 관련 논문, 임상시험 가이드라인 등을 기반으로 연구를 이어갔어요. 한국에서 1세대 디지털 치료제 개발기업으로 인정받아 보건복지부나 식약처의 실무자 협의체에도 참여하게 됐어요.”
불면증에 가장 먼저 도전하기로 했다. 불면증은 병원을 자주 찾기 번거로운 질병이면서, 생체 정보와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치료 효과를 낼 수 있는 분야라고 판단했다. 불면증 디지털치료제 ‘필로우Rx’를 개발하고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불면증 상담 치료, 긴장 이완 훈련 등 인지행동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금융 정보를 통해 커피 구매 내역, 일조량, 걸음 수, 수면시간, 운동시간 등 수면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해서, 적정 수면 시간과 권장 생활 습관을 알려주는 기능도 있습니다. 환자 정보는 병원에 있는 의사에게 전달돼 적절한 의약품을 처방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합니다.”
정확하고 즉각적인 치료로 빠른 회복을 돕는 것이 필로우Rx의 강점이다. “매일 병원에 가는 효과를 누리는 겁니다. 병원 외래 일자보다 환자의 질병 회복 속도가 빠르면 약을 줄일 수 있고, 외부적인 요인으로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면 약을 교체하거나 투약량을 늘릴 수도 있죠. 아울러 환자의 기저질환 정보, 외래 내역과도 연동되니 정확한 약품 처방이 가능합니다. 환자에게 구두로 질문하는 데 의존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데이터로 진단을 내리는 거죠.”
◇케어(Care)와 큐어(Cure)는 한 끗 차이
20명 남짓의 제약회사와 전자회사 출신 연구원이 웰트에서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국내에서 디지털 치료제로 임상시험 승인을 받은 기업은 웰트를 포함해 5곳뿐이다.
서울산업진흥원의 R&D지원 및 IP지원을 통해 서울 시내 병원 연계, 기술 컨설팅 지원, 특허전략 컨설팅, 해외 권리화 지원 등의 도움을 받았다. 한독약품, 삼성전자, 한화손해보험 등에서 누적 14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현재 ‘필로우Rx’는 4단계의 임상시험 단계 중 두 번째 단계를 진행하고 있다.
2~3년 내 치료제 5개를 추가로 개발해 제품군을 늘려갈 계획이다. 강 대표는 10개 정도의 디지털 치료제가 의사에 의해 빈번하게 처방되는 수준에 이르러야 디지털 치료제 시장이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어떤 일이든 ‘왜(Why)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스스로 이 일을 ‘왜 하는지’ 납득이 안 되는 순간 동력을 잃기 쉬워요. 전 관리와 치료의 간극을 좁혀 건강 수명을 늘리겠다는 목표로 일해요. 대부분 제가 근무 분야를 자주 바꿨다고 생각하시는데요. 한 번도 직종을 바꿨다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꿈을 펼치기 위한 방법을 선택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죠.”
/김영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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