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에서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는 사람들
과거 우리나라는 스위스, 일본에 이은 시계 3대 생산국이었다. 삼성 같은 유명 대기업도 시계 사업을 영위했고, 서울 종로구 예지동 일대는 국내 최대의 예물 상가이자 시계 명장들의 사관학교로 이름을 날리며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며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기술력은 스위스 명품 브랜드에 밀리고, 중국의 저가 시계에 가격 경쟁력이 밀리면서 한국 시계 산업의 위상이 급격히 하락한 것이다. 한국시계산업협동조합의 통계를 보면 2021년 기준 우리나라 시계산업 규모는 3조9840원인데, 이 중 국내 기업의 시계 생산액은 1.88%인 740억원에 불과하다.
불모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한국 시계 시장에서 도전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 한국 시계 스타트업의 끝나지 않은 도전기를 알아봤다.
◇홈 인테리어족 취향 겨냥한 LED 벽시계
LED 시계 전문 기업 ‘지성아이엔씨’는 시계에 트렌드를 접목해서 기회를 찾았다. 코로나19 이후 홈 인테리어 시장이 급성장한데 착안해 LED 전자 달력·벽시계 ‘플라이토’를 개발한 것이다.
지성아이엔씨의 박기현 대표는 “집 꾸미기 열풍에 힘입어 LED 벽시계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어딘가 아쉬웠다”며 “디자인이 세련된 달력 시계가 있으면 주목을 받을 것 같았다”고 개발 배경을 밝혔다.
2022년 2월, 기존의 LED 벽시계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LED 벽시계 플라이토를 출시했다. 플라이토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인기를 끌었다. 나뭇결이 살아있는 목재 소재로 된 본체에 흰색 LED 불빛으로 시간과 날짜 정보를 띄운다. 시간은 물론 달력 날짜는 자동으로 바뀐다. 인테리어 환경에 따라 크림, 마블, 딥 그레이, 블랙 등 색상을 고를 수 있다.
여기에 기술을 접목해 활용성을 넓혔다. 자동 밝기 센서가 탑재돼 있어 주변 공간의 광량에 맞춰 시계의 불빛을 알아서 조절한다. 제품 하단의 온·습도 센서를 통해 실내 온도와 습도 정보를 알 수 있다. 어린 자녀를 키우거나 악기가 보관된 장소처럼 공간의 적정 환경 유지가 중요한 곳에 적합하다.
플라이토는 심미성과 실용성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 대표는 “지난해 매출 100억원 가운데 80% 이상이 LED 시계 제품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손목시계라는 어려운 길 굳이 선택한 남자
지성아이엔씨처럼 트렌드에서 기회를 찾은 곳이 있는가 하면 ‘손목시계 제조’라는 전통의 영역에 출사표를 던진 기업도 있다. 2019년 설립된 ‘가디우스’는 드레스 워치 브랜드 ‘커스벤’의 운영사다.
가디우스의 경진건 대표는 우리나라 시계 산업에서 잔뼈 굵은 인물이다. 경 대표는 1985년 대학을 졸업하고 아남산업 시계사업부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시계의 생산 기획, 조정, 물류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해외 유명 브랜드의 제조 라인을 담당하면서 스위스나 일본으로 출장도 자주 다녔다.
평소 진입 장벽이 높고, 가격이 불투명했던 우리나라의 시계 유통 구조에 아쉬움을 느낀 그는 이랜드 그룹의 신규 사업부로 자리를 옮겨 시계 브랜드 ‘로이드’를 론칭했다. 업계 최초로 시계 매장을 프랜차이즈화하고 가격 정찰제를 도입한 것이다. 퇴사 후에는 시계, 주얼리 브랜드 컨설턴트로 일하며 국산 주얼리 브랜드 ‘제이에스티나’의 론칭을 이끌었다.
어렵디 어려운 손목시계 제조에 도전장을 내민 이유는 시계 산업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경 대표는 “2000년대 이후 명품 시계 시장은 점점 커지고, 중저가 국산 브랜드들이 빠르게 망해갔다”며 “수천만원짜리 명품 시계와 10만원 이하 저가 시계 사이에서 살만한 시계가 없어졌다. 한때 시계의 대중화를 꿈꿔 브랜드까지 론칭해 본 입장에선 아쉬웠다”고 창업 배경을 밝혔다.
그는 시장이 작아도 합리적인 가격으로 맞춤 시계를 갖고자 하는 수요는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하고 커스벤을 론칭했다. 커스벤은 클래식한 디자인의 드레스 워치 전문 브랜드다. 커스벤에서 미리 정해 둔 옵션이 몇가지 있다. 14종의 제품 컬렉션이 있는데, 각각 시계 케이스 2개, 다이얼 6개, 핸즈 6개, 스트랩 18개, 버클 4개 중에서 맘에 드는 것을 골라 조합할 수 있다. 경우의 수로 따지면 10만종 이상의 시계 종류가 나온다. 선택을 잘 못하는 소비자를 위해 20종의 베스트셀링 조합도 판매하고 있다.
완성도 있는 마감을 위해 고품질의 부품을 한국에 들여와 직접 조립한다. 스위스·일본산 무브먼트, 이탈리아산 가죽, 0.7mm 두께로 도금한 의료용 스테인리스 케이스, 사파이어 글라스 등 수백, 수천만원대 시계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준의 원·부자재를 썼다. 문페이즈 기능이 있는 라인도 있다. 명품 시계의 외형인데 가격은 20만~50만원대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대만과 일본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일본 등에선 이미 맞춤 시계와 합리적 가격대의 시계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경 대표는 “스마트 워치가 인기지만 시계 고유한 매력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며 “올해에는 오토매틱 시계 라인을 추가해 선택지를 넓혀보고 싶다.”고 말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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