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25년 차 양파 농부 이홍주씨
'손이 많이 간다.'
사람의 노력이나 관심이 많이 들어가는 수고스러운 상황에서 쓰는 말이다. 농업은 손이 많이 가는 대표적인 산업이다. 그나마 벼농사는 표준화된 시스템을 갖춰 이앙기·경운기·파종기 등 기계가 많은 부분을 대신하는데, 밭 농사는 기계화 속도가 아직 더디다. 지역별로 기후·토양 등 환경이 달라 재배 작물이 다양해 표준화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외가 있다. 경상남도 함양군의 양파 농사는 기계화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전국 10여 곳의 양파 주산지 중 기계 보급률이 가장 높다. 함양에서 쓰는 양파 관련 농기계는 파종기·정식기·줄기절단기 등 8개 종류로 총 571대에 달한다. 사람 손이 귀해지면서 기계 도입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인력난을 딛고 일어선 이홍주 함양군 양파연합회 회장(51)을 만나 농사 기계화 이야기를 들었다.
◇전국 양파 농부가 함양으로 모여드는 이유
2022년 기준 전국 양파 재배 면적은 1만7661㏊(헥타르)다. 이 중 경남 함양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3.9%(691㏊). 그리 큰 비중이 아니다.
주목의 이유는 생산성에 있다. 전국 생산량(119만5563톤)의 4.3%(5만1192톤)를 차지해, 면적 비율보다 높다. 단위 면적 당 생산량이 높은 것이다. 기계화 덕분이다. 함양의 기계화 농업은 양파 농부들은 물론 함양농협, 함양군청까지 합세해 완전체로 진화하고 있다. 2023년 상반기 전국에서 약 2000여 명의 농부가 노하를 전수받기 위해 함양을 다녀갔다.
지난 6월 15일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참석해 ‘함양군 양파기계화 수확 현장 시연회’ 행사도 열렸다. 함양 양파 농부들은 이 자리에서 “기계화 육묘 노하우를 집약한 설명서가 있으니, 이를 전국 양파 농가에 보급해달라”고 건의했다. 정 장관은 “양파 주산지를 중심으로 양파 농가의 기계화 전환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화답했다.
◇양파밭에 기계를 놓기까지
이홍주 농부는 논 1만평(약 3만3000㎡)에서 벼농사를 짓던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성인이 된 후에는 양파밭에서 돈을 벌었다. 주로 수확을 마친 양파를 트럭에 싣는 일이었다. 하루 일당이 2만원이던 시절, 일주일 만에 30만원을 벌었다. “양파 농사를 어깨너머로 보니 벌이가 꽤 좋아 보이더군요. 부모님께 ‘양파 농사를 지어보자’고 제안했죠. 그때 제 나이 27살이었습니다.”
1997년 논 3000평의 바닥을 갈아엎고 양파를 심었다. 한 푼 두 푼 모은 돈 2000만원으로 트랙터를 샀다. “당시엔 기계라곤 아버지가 쓰시던 경운기가 전부였어요. 농사일은 잡아 뜯고, 끌어당기는 식의 일이 많은데 트랙터가 그런 일들을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첫해 매출이 2000만~3000만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해요. 딱 트랙터 값을 회수한 셈이죠.”
현재 이 회장은 1만5000평 규모의 밭에서 양파 농사를 짓고 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넓은 땅이다. 농사를 도와주는 건 아들도 딸도 아닌 기계다. 트랙터는 기본이고 정식기(육묘를 본토에 옮겨심는 일을 도와주는 기계), 줄기절단기, 비닐수거기, 굴취기(흙을 털어 작물을 한쪽으로 모아주는 기계), 수집기(땅에 모아둔 작물을 거두어들이는 기계), 고소작업차(상차용 장비) 등이 농사일을 돕는다.
- 기계를 도입하기로 결심한 이유는요.
“농촌에서 ‘인력난’은 현실입니다. 모종 심는 날 20명의 인부가 온다고 해서 그만큼의 모종을 준비했는데, 10명만 온 일이 있어요. 나머지 10명분의 모종은 못 심고 버렸죠. 수확시기엔 양파 줄기를 자르고, 비닐을 걷고, 양파를 뽑고, 거두는 일까지 하려면 몸이 10개라도 모자랍니다. 인건비는 부르는 게 값이 돼요. 어제는 인당 15만원이라고 했다가 다음날 갑자기 18만원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어요.”
- 어떤 기계부터 들여왔나요.
“2015년 4600만원을 들여 ‘정식기’를 샀습니다. 사용 설명서만으로는 부족하단 생각에 홀로 일본 홋카이도로 견학을 다녀왔습니다. 정처 없이 차를 타고 가다가 정식기가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우고 농부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리곤 해질녘에 소주 한 병을 들고 찾아갔죠. ‘한국에서 온 양파 농부인데 공부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했더니 흔쾌히 자신의 집 안쪽에 있는 육묘장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렇게 전수받은 노하우를 농사에 적용했죠.”
- 수확량이 바로 늘던가요.
“아닙니다. 오히려 엉망진창이었어요. 정식할 때만 해도 좋았죠. 정식기 한 대가 20명분의 일을 합니다. 인부가 몇 명이나 올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는 날에 언제든 정식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이듬해 양파를 수확하고 저장고에 넣자마자 양파가 물렀습니다. 컨테이너 하나를 꽉 채웠던 양파를 모두 버려야 했습니다. 어림잡아도 수억원대의 손실이었어요.”
- 어떻게 극복했나요.
“원인을 찾기 위해 2018년 또다시 일본을 찾았습니다. 일본도 비슷한 문제를 겪은 적이 있더군요. 알고보니 기계로 정식할 때 육묘에 미세한 상처가 나고 그 상처를 통해 ‘후사리움균(토양 전염병을 유발하는 균)’이 침투한 탓이었어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땅에서 띄우는 ‘공중 육묘’를 하고 육묘용 트레이를 소독하더군요. 한국으로 돌아와 그대로 적용해서 다시 기계 정식에 도전했더니 후사리움균을 95% 이상 퇴치할 수 있었습니다.”
◇기계가 도와주는 양파 농사
양파는 1년 농사다. 늦여름 하우스에서 육묘하고 10월에 모종을 밭에 옮겨 심는다. 심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병충해를 입지 않도록 관리해 줘야 한다. 물이 부족하면 수시로 물을 대준다. 수확기인 5~6월이 가까워오면 전투태세가 된다. 일주일 내지 보름 안에 1만평이 넘는 땅에서 양파를 모두 거둬야 한다.
- 양파 수확 단계가 궁금합니다.
“먼저 줄기를 잘라야 합니다. 다음으로 밭을 덮었던 비닐을 수거하고, 양파를 하나씩 캐서 가운데로 모아 망에 담죠. 이 모든 단계에서 기계의 힘을 빌리고 있습니다. 예전엔 낫으로 하나하나 줄기를 베었지만 이젠 줄기절단기를 이용해요. 아래로 바람을 불어넣어 주면 줄기가 수직으로 서고 이때 절단하는 방식이죠. 비닐 수거기와 굴취기는 트랙터에 부착해서 씁니다. 또 수집기를 이용해 빨간 망 대신 메시파레트(철망으로 만든 대형 바구니)에 양파를 담아요. 팔레트 하나에 500㎏이라 1톤 트럭에 두 파레트를 실으면 딱 맞아요. 그 후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함양농협 산지유통센터로 보냅니다.”
- 이렇게 많은 기계를 쓰려면 초기 비용이 만만찮겠는데요.
“수확할 때 쓰는 장비 가격을 모두 합하면 1억5000만원이 넘습니다. 길어야 보름 만에 끝나는 수확을 위해 들이기에 부담스러운 가격이죠. 비결이 있습니다. 직접 구매한 기계는 정식기 한 대뿐입니다. 나머지는 함양군 주산지 일괄 기계화 사업의 지원을 받았어요. 함양군에서는 농가들에게 기계 가격의 1% 임대료로 대여해 주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5000만원짜리 기계를 1년에 50만원만 내고 쓸 수 있어요.”
- 수확이 끝나면 어떤 일이 남아있나요.
“함양에서는 2모작을 합니다. 같은 땅에 벼·양파 농사를 번갈아서 짓고 있죠. 양파 수확이 끝난 밭을 뒤엎어서 햇볕을 충분히 쬘 수 있도록 한 달 정도 가만히 둡니다. 다른 지역보다 조금 늦게 물을 대고 벼농사를 시작하죠. 10월에 쌀을 수확하고 나면 그 자리를 또 뒤엎어 양파를 심으니 한 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작년에 캔 양파, 올해도 먹을 수 있는 이유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수확한 함양 양파는 함양농협 산지유통센터에 모인다. 하루 처리 물량이 최대 100톤을 웃돈다. 대부분의 물량은 입고되자마자 저장고로 직행한다. 저장고는 온도 0~0.5도, 습도 65~75%를 유지한다. 6월에 들어온 양파는 이듬해 4월까지 주문량에 맞춰 그때그때 출고된다. 농협 하나로마트를 포함한 대형마트 5곳이 주 거래처다. 함양군농협조합공동사업법인 정영재 대표(49)에게 함양 양파의 선별·유통 과정을 들었다.
- 양파는 어떻게 선별하나요.
“먼저 흙을 털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기계에 양파를 쏟아부으면 기계가 양파와 흙먼지를 분리해 줘요. 그리고 양파를 직경을 기준으로 6~7㎝, 7~8㎝, 8~9㎝, 9㎝ 이상 등 4단계로 분류합니다. 수확 철엔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기계, 사람 가릴 것 없이 풀가동해야 합니다. 약 30명의 인력이 보름간 밤샘 작업을 해야 할 정도죠.”
- 양파 농사 기계화 이후 유통센터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저장 효율성이 높아졌습니다. 양파는 오래 두고 먹는 작물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관하느냐에 따라 비용 차이가 큰데요. 기존에 빨간 망 하나에 20㎏씩 담던 방식과 비교해 메시파레트에 500㎏씩 담아 보관하면 1.5배 더 많은 양을 쌓아둘 수 있습니다. 양파 보관은 통풍이 생명입니다. 곰팡이가 최대 적이죠. 메시파레트 사이에 정기적으로 바람을 불어넣어서 양파가 상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습니다.”
- 양파를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1인 가구에겐 한 망에 담긴 양파 8~9개가 많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텐데요. 잘 보관하면 몇 개월도 거뜬합니다. 양파는 구멍이 숭숭 뚫린 바구니에 보관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땅한 바구니가 없다면 종이상자에 직접 구멍을 뚫어도 괜찮아요. 양파는 습기에 취약하기 때문에 신문지에 하나씩 개별포장한 뒤 바람이 잘 통하는 서늘한 곳에 보관하세요. 무더운 여름엔 냉장고 야채칸에 넣어도 괜찮아요. 단 0도 이하로 내려가 양파가 얼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회장님
이홍주 농부는 직함이 한두 개가 아니다. 함양군 양파 연합회 회장부터 전국 양파 생산자협회 부회장, 한국 양파연합회 의무자조금 관리위원장, 함양농협 비상임이사 등 손에 꼽기도 어렵다. 매년 양파를 심는 가을과, 수확하는 초여름에는 전국양파생산자협회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릴 영상도 촬영한다. 이 회장이 직접 출연해 어떤 기계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설명하고,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문의하라고 말한다.
- 농사지으랴, 노하우 전수하랴 정말 바쁘겠네요.
“직함을 다는 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에요. 군청, 농협은 물론 타지역의 양파 협회 관계자와도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죠. 양파밭에 있다가도 수시로 불려 나갑니다. 그래도 ‘저렇게 밖에 돌아다니면서 양파 잘 키우겠냐?’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얼마나 본업에 신경쓰는지 몰라요.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큰다’는 말이 있는데요.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낮에 밭일을 못 본 날엔 밤에라도 나옵니다. 수확으로 바쁜 요즘 같은 날엔 하루에 2시간도 못 자는 날이 며칠간 이어지기도 하죠.”
- 매출은 어느정도인가요.
“올해 수확량이 평당 30㎏ 정도입니다. 1만5000평으로 값을 환산해 보면 약 4억원어치 정도의 양파를 재배한 셈이네요. ‘밖으로 조금만 덜 다녔더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하는 후회가 남지만, 그래도 선방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1년간 잘 버텨준 양파들에게 고마울 따름이죠.”
- 양파와 함께한 25년의 세월을 돌아본다면.
“양파밭을 보고 있으면 ‘가족’과 함께 있는 기분이 듭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붙어있으니까요. 농기계들은 ‘친구’ 같아요. 기계가 없던 시절엔 옆집 형님, 뒷집 동생과 품앗이하면서 서로 일을 도와주기도 했는데요. 이젠 기계가 모진 일들을 도맡아 주고 있습니다. 기계를 보는 마음이 이렇게 애틋해질 줄 몰랐어요. 양파를 심을 때 ‘올해도 같이 잘해보자’하고 다짐하곤 해요. 오늘 수확을 도와준 기계도 토닥토닥 두드려 줄 참입니다. ‘고생 많았다’면서요.”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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