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의 두뇌를 개발하는 디하이브 김재영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을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인간의 상상은 끝이 없다. SF영화에선 멸종된 공룡을 되살리고, 순간이동을 하거나 기억을 조작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리 허황한 설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수십 년 전엔 상상만 하던 일들이 2023년엔 일상이 됐기 때문이다. 영상 통화, 3D 영화관, 지문 인식, 전기 자동차 등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자신만의 SF영화를 그려온 이가 있다. 로봇 버전의 인력 사무소를 만드는 스타트업 디하이브(D.Hive)의 김재영 대표(29)다. 복잡하고 지루한 노동을 로봇이 대신 해주는 세상을 꿈꾸며 창업의 길에 들어섰다. 김 대표를 만나 영화를 현실로 바꾸기 위한 계획을 들었다.
◇9살이 꿈꾼 유토피아
초등학교 2학년. 취미는 아버지 서재 들쑤시기였다.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다 어느샌가 한 권 두 권 꺼내 읽는 재미에 빠졌다. 당시 가장 흥미를 끌었던 책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었다. “상품과 화폐, 잉여가치 등을 논하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뭔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돈과 계급이 없는 사회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도 ‘이것만은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건 ‘노동’이었다. “어릴 땐 막연하게 로봇이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세상을 떠올렸어요. 어렵고 힘든 일은 로봇에게 맡기고 인간은 각자 하고 싶은 일만 집중할 수 있다면 세상이 훨씬 빠르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저만의 ‘유토피아’를 정의해 나갔습니다.”
2011년 만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카이스트 수학과에 입학했다. “공부보다는 어떻게 하면 유토피아를 현실로 만들 수 있을지에 관심이 많았어요. 군 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정리됐습니다. 제가 상정한 유토피아를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은 ‘창업’이라는 결론을 내렸죠. 제대 후 경영학을 복수전공 하면서 전산·기계공학·전자 등 광범위한 전공과목을 두루두루 공부했습니다."
일단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2017년 두 번의 사업을 벌였다. 주스 장사와 도시락 장사였다. "새벽 4시에 청과물시장에 가서 과일을 사 와 직접 갈아서 판매했습니다. 카이스트 재학생을 타깃으로 아침 도시락을 만들어 팔기도 했죠. 결과적으론 둘 다 말아먹었어요. 주스 한 잔에 마진이 100~200원 수준이라 계속 적자만 났거든요. 결정적으로 대학생들이 아침에 뭘 챙겨 먹질 않더군요. 소비자 분석이 부족했던 겁니다."
더 이상 딴 길로 샐 수 없었다. 로봇이 노동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로봇의 발전이 어느 단계까지 왔는지 가늠하기 위해 스마트폰이 상용화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봤습니다. 유선 전화기에서 출발해 휴대전화(모바일)가 나왔고 여기에 앱 같은 편의 요소가 붙어 스마트폰이 탄생했죠. 현재의 로봇 발전 상태는 모바일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봤습니다. 지금보다 더 '스마트'해지기 위해선 사람으로 치면 두뇌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를 고도화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죠."
◇드론, 하늘을 나는 로봇
2019년 고등학교 동창, 대학 선배 등 지인을 모아 로봇 소프트웨어 개발 스타트업 '디하이브'를 세웠다. 가장 먼저 뛰어든 분야는 '드론'이었다. "세계 드론 산업의 90% 이상을 중국의 DJI란 회사가 차지하고 있었는데요. 경쟁자의 도전을 받지 않는 독점 시장은 아무래도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선의의 경쟁자가 되겠다는 각오로 드론 소프트웨어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개발, 연구 그리고 실험의 반복이었다. 개발 1년 만에 현장 테스트를 할 기회가 생겼다. 드론이 할 일은 '농약 방제'였다. 지역농협 5곳의 협조를 얻었다. "드론업체 한 곳에서 하드웨어를 제작하고 저희는 소프트웨어를 담당했습니다. 기존 드론은 전깃줄, 나뭇가지에 걸려 떨어지기 쉬운데요. 카메라를 기반으로 주변 지형물을 감지해 정지하거나 피해 가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습니다. 일종의 드론식 자율주행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죠."
약 6개월간의 시험 운행은 성공적이었지만 수익으로 연결되진 않았다. “소비자들이 소프트웨어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에 보수적이더군요. 좋은 경험 했다고 마음을 달래는 한편 이 기술을 응용해서 한걸음 더 나아갈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비교적 상용화가 많이 된 자율주행로봇(AMR)에 소프트웨어를 얹으면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장소만 옮긴거죠."
언뜻 보면 도로 위 자율주행 로봇은 보편화 단계로 진입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출발지와 도착지를 설정하고 로봇을 움직이는 기술을 쓰는 곳은 많아요. 다만 모든 경로를 미리 입력해 둬야 한다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죠. 1.5㎞의 지도 데이터를 구축하는 데 1500만원이 듭니다. 기차가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여러모로 비효율적인 구조였어요.”
로봇을 대중교통 같은 사회 인프라 중 하나로 가정하고 접근했다. 로봇 노동의 가치를 가장 확실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영역은 ‘운반’이라고 봤다. “현재 기술로는 로봇이 오토바이 탄 사람을 이길 순 없습니다. 배달원이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순간에 주목했어요. 대표적으로 아파트 단지가 있죠. 보행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로봇을 만들면 ‘물건을 옮기는 일’은 더 이상 인간이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봤습니다.”
◇로봇끼리 절대 부딪칠 일이 없는 이유
드론 개발에 활용한 자율주행 시스템을 녹여 AMR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12만개의 식당에서 400만가구를 대상으로 로봇 배달을 하려면 약 5000억개의 초기 경로를 녹화해야 합니다. 로봇이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죠.저희는 수많은 경로를 미리 설정해 놓지 않아도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카메라와 복합센서를 달았습니다. 40미터 거리 안에서 0.5㎝의 오차로 장애물을 인지할 수 있죠.”
디하이브의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로봇은 전봇대, 입간판처럼 가만히 서 있는 물체는 물론 보행자, 전동 킥보드 등도 피해 갈 수 있다. 자체 개발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기술 덕에 가능한 일이다. “뭔가 나타난다고 갑자기 멈추는 게 아닙니다. 베트남에선 보행자가 도로를 건널 때 아무리 오토바이가 많아도 멈춰선 안 돼요. 목표지점만 바라보고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오토바이가 알아서 피해 가기 때문이죠. 로봇도 마찬가지로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갑니다. 보행자나 자동차, 전동킥보드 등은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피해 갈 수 있습니다.”
지역농협, 골프장 등과 PoC(proof of concept, 개념검증)를 진행 중이다. “구례 산동농협에서 농협 조합원 500~1000명을 대상으로 생필품을 배송하고 있어요. 골프장에서는 로봇 2대를 투입하면 1년 유지비용을 4000만원 이상 절감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죠. 아파트 단지에서는 1~2층의 정보만으로 20층까지의 경로를 모두 자동 생성해 택배를 분배할 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갈아 넣었지만’ 2022년 디하이브의 매출은 0원이었다. “그간 소프트웨어 개발과 안정화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젠 상용화에 전력을 다할 때입니다. 두 가지 길을 열어뒀어요. 자율이동로봇을 판매하면서 동시에 로봇 관제 시스템을 제공하려고 해요.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900만원에 로봇 한 대를 설치할 수 있습니다. 이미 사용 중인 로봇이 있다면 월 30만원대의 이용료를 내고 소프트웨어를 구독할 수도 있죠.”
◇유토피아로 가는 길
스마트폰의 보급화가 사회, 경제 전반의 판도를 바꾼 것 처럼 스스로 움직이는 로봇의 등장은 일상의 풍경을 크게 바꿔놓을 전망이다. “5년만 흘러도 우리 삶의 모습은 많이 바뀔 겁니다. 로봇을 기반으로 하는 스마트 인프라가 깔리면, 마트 앞에 설치된 로봇이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어주거나 범죄 예방을 위한 로봇이 밤길을 순찰해 주겠죠. 좀 더 먼 미래엔 인간이 가진 노하우를 클라우드에 저장하면 이를 학습한 로봇이 똑같이 일할 거예요. 용접, 인테리어 등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작업까지 대신할 수 있는 것이죠.”
그의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 지난 6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이 주관하는 창업경진대회(디데이) 본선 무대에 올랐다. “로봇이 노동자를 ‘대체’한다기보단 ‘역할을 전환한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제 목표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있어서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딱 한 걸음 정도를 내디딘 것 같아요. 아직 갈 길이 멀죠. 꿈을 현실로 만드는 일은 매일매일 저를 설레게 합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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