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고랭지 배추 재배하는 임병철 농부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고도는 해발 700~800m라고 한다. 고기압과 저기압의 경계 지점으로 기압의 변화가 적어 안정적이고 인체에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몸의 혈액순환은 더욱 원활해진다. 덕분에 저지대에 있을 때보다 피로가 빠르게 회복된다.
여기에서 배추를 재배하면 어떨까. 기압이 안정적인 것과는 달리 해당 고도의 대기 온도는 들쭉날쭉하다. 특히 한여름은 낮 기온이 30도까지 올랐다가 밤에 20도 이하로 떨어진다. 오히려 좋다. 더위에서 잠시 벗어나 쉴 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배추나 마찬가지다.
대관령원예농협 임병철 이사(65)는 해발 고도 760m인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에서 45년 넘게 배추와 무 농사를 짓고 있다. 임 이사를 만나 대관령의 자연이 사람과 배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들었다.
◇평창에서 자란 여름 배추의 맛
5년 전만 해도 강원도 평창군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준비로 떠들썩했다. 요즘은 2024 강원 동계청소년 올림픽 준비가 한창이다. 연이어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을 만큼 겨울철 혹독한 추위가 불어닥치는 곳이다.
여름은 살기 좋다. 평균 고도 600m가 넘는 평창은 여름철 평균 기온이 20도 내외로 서늘하다. 다만 일교차는 큰 편인데, 그 환경이 여름철 배추 재배에 안성맞춤이다. 일교차가 클수록 배추에 이슬이 많이 맺히는데 여름철에 고랭지 배추는 이슬을 먹고 크면서 잎이 단단해진다. 반으로 갈라 속잎을 베어 물면 고소한 배추즙이 입안을 채운다. 아삭아삭한 식감은 덤이다.
◇고향이 내게 준 일
임 이사는 대관령에서 나고 자랐다. 방과 후에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감자·배추·무로 채워진 4000~5000평(약 1만5000㎡)의 땅에서 소로 밭을 갈고 호미로 김을 맸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아버지를 따라 농부가 됐다. 45년이 흐른 지금 임 이사의 농지는 1만5000평(약 50만㎡)이 됐다. 연간 50~60톤의 농산물을 생산한다.
“젊을 땐 서울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어요. 그러다 24살이던 1982년에 농어민후계자 정부 지원금으로 65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농지 3000평을 마련했죠. 그렇게 고향 땅에 눌러앉게 됐습니다. 동창 중에 도시에 정착한 친구들이 많은데 이 나이 들어 보니 도시 생활도 만만찮아 보이더군요. 몸도 마음도 편한 대관령에 남길 잘했다 싶어요.”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27년간 의용소방대로 활동했고, 27년 중 마지막 2년은 대장을 맡았다. 누가 부추긴 것이 아니었다. 모두 좋아서 한 일이었다. “대관령은 눈이 많이 와요. 설산 풍경은 국내 관광객은 물론 해외에서도 사진을 찍으러 올 만큼 장관이죠. 그만큼 조난객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안전 장비를 챙겨 들고 동료들과 팀을 이뤄 구조를 하러 다녔습니다. 야속한 세월 탓에 지금은 은퇴했지만 마을에 무슨 일이 나면 언제든 두 팔 걷어붙일 준비가 돼 있습니다.”
◇고랭지 배추가 여름을 나는 법
대관령은 여름 고랭지 배추 농사로 유명하다. 고랭지의 독특한 여름 기후가 이 지역의 배추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한여름 오후에 내리쬐는 햇빛을 견디면 선선한 저녁 바람이 찾아온다. 일교차가 클수록 배추는 단단히 여문다. 6월에 심은 배추는 여름 내내 자라 추석이 오기 전에 수확한다. 여름 고랭지 배추로 김치를 담그면 고소한 배추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
- 배추를 심기 전에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요.
“지력(地力)을 키우기 위해 5월 중순부터 밭에 퇴비를 뿌립니다. 배추 정식(육묘를 본 밭에 심는 일) 열흘 전에 이랑을 짓고 비닐을 씌워요. 이랑 너비는 68㎝에 맞추고, 배추는 38㎝ 간격으로 심습니다. 어린잎은 병충해에 취약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약을 뿌려줘요. 정식하고 25일 정도가 지나면 초록색 알갱이처럼 생긴 추비(작물 생육 중에 뿌리는 비료)로 땅에 힘을 보탭니다. 매년 6~7월이 가장 바쁘죠.”
- 어떤 품종의 배추를 재배하나요.
“고랭지 배추는 주로 여름철 무더위에 강한 품종으로 고릅니다. 작년엔 ‘수호’란 품종을 심었는데 상대적으로 고온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폭염이 기승을 부릴 때 배추가 물렁물렁해지면서 폭삭 주저앉아 버리는 무름병이 찾아왔습니다. 배추가 아프니 저도 아프더군요. 몸무게 5㎏이 빠질 만큼 마음고생을 했어요. 올해는 ‘오대’라는 품종으로 바꿔봤습니다. 확실히 작년보다 작황이 좋아요.”
- 작년보다 올여름이 더 덥지 않나요.
“그렇다고 올해는 별 탈 없이 배추가 잘 컸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배추는 활짝 벌어진 상태로 크다가 수확할 무렵이 되면서 서서히 오므라드는데요. 예정보다 이르게 오므라드는 배추가 심심찮게 보여요. 이럴 때는 물을 많이 줘야 합니다. 평년 같으면 일주일에 한 번 주기로 비가 내리지만 올해는 유난히 비가 내리지 않았어요. 20톤 들이 통에 물을 가득 담아 700~800미터짜리 호수를 연결해 밭에 물을 뿌렸죠. 올여름 홍수 피해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늘이 야속했습니다. 비가 골고루 내렸다면 사람도 살리고 배추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싶은 생각이 들었죠.”
- 여름인 지금부터 배추 수확 전까지 어떤 작업이 남았나요.
“40일까지 키운 배추는 제 손을 떠나 농협 관리단에 넘어갑니다. 농협과 계약재배를 하고 있기 때문이죠. 배추의 수급 불안정을 막고 고령화로 인한 일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후반 작업을 농협에서 맡아주고 있어요. 매일 밭을 찾아와 배추 상태를 살피고 약제나 방제가 필요한 밭이 있으면 공동방제단이 일괄적으로 농약을 살포합니다.”
- 수확은 어떻게 하나요.
“9월 초중순에 농협 관리단과 함께 수확할 날을 정하면 당일에 5톤 트럭 2~3대가 옵니다. 더운 시간대를 피해 새벽 4~5시부터 작업을 시작해요. 빨리 끝내기 위해 인부도 7~8명을 부르죠. 오후 2~3시까지 쉬지 않고 배추를 따고 싣는 일을 반복합니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에 수확하는 농가는 밤 10시부터 작업을 시작하기도 하더군요.”
- 계약재배를 하면 매년 매출이 일정하겠네요.
“작황에 따라 평당 단가를 달리 책정하는 구조입니다. 작년엔 평당 1만원에 계약했는데요. 올해는 작황이 좋은 편이라 1만1000원 정도로 예상해요. 총 1억3000만원 정도의 매출에서 유지비용을 제하면 40% 정도가 남습니다. 농가 입장에선 안정적인 수급처를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시름 덜 수 있습니다.”
◇하루에 배추 80톤을 절일 수 있는 곳
임 이사가 재배한 배추는 대관령원예농협 채소사업소(이하 채소사업소)로 향한다. 채소사업소의 관할 구역은 대관령뿐만이 아니다. 전국 956개 농가가 채소사업소로 배추를 보낸다. 지역에 따라 배추 재배 시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겨울은 전남 해남과 진도, 봄은 충남 예산과 경북 문경에서 재배한 배추가 일품이다. 강원 평창·강릉·태백·삼척 등지에서 재배한 배추는 여름에 각광받는다.
1300평(약 4300㎡) 규모의 채소사업소에는 예냉(수확 직후 청과물의 온도를 빠르게 낮추는 과정) 창고와 배추절임 시설이 있다. 예냉 창고는 최대 2200톤의 배추를 보관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다. 채소사업소에 입고된 배추의 약 60%는 절임 배추로 유통된다. 배추 가공 과정에 투입되는 인력만 40명에 달한다. 신영주 소장(51)을 따라 채소사업소에서 배추가 들어가고 나가는 과정을 살펴봤다.
- 배추를 절이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먼저 반으로 쪼갠 배추를 1.5m 깊이의 절임 통에 쏟아 넣습니다. 염분이 골고루 스며들도록 건염이 아닌 간수를 이용해 절여요. 배추를 18시간 동안 소금물에 담그는거죠. 배추에서 나오는 물 때문에 중간에 염도가 낮아질 수 있어 간수를 전부 뺐다가 채우는 작업을 2번 반복합니다. 이후엔 배추를 건져 1차 정선(精選)합니다. 정선이란 상한 잎을 떼어내거나 잘라내는 작업입니다. 이후 세척기를 3번 거쳐 2차 정선을 진행합니다. 이때 또 한 번 결점이 있거나 밑동이 작은 배추를 걸러냅니다. 금속검출기를 통과한 다음 맑은 물에서 헹구면 끝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인 해썹(HACCP) 위생시설에서 이뤄집니다.”
- 이곳에서 절인 배추는 어디로 가나요.
“크게 김치공장과 가정집으로 배달됩니다. 6월부터 8월까지는 대부분 종가집이나 한국농협김치 같은 유명 김치 브랜드로 공급됩니다. 휴가철엔 김치를 사 먹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본격적인 김장철인 9월부터 12월까지는 5·10·20㎏ 단위의 소매 수요가 폭증합니다. 하루 만에 80톤에 달하는 주문이 들어와서 이틀에 걸쳐 40톤씩 출하한 적도 있습니다.”
◇혹한기와 혹서기에 제일 바쁜 사람
한여름 대관령에 불어드는 바람은 겨울이 되면 매서운 칼바람으로 변한다. 일주일 넘게 영하 10~15도를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이는 명태를 말리는 데 최적의 조건이다. 적어도 일주일간 녹지 않는 상태로 말려야 통통한 황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이라도 녹으면 물이 빠져서 쪼글쪼글한 황태가 된다.
임 이사는 배추만큼이나 황태에 일가견이 있다. 여름 한 철용인 배추농사는 삼남매를 키우기엔 역부족이었다. 23년 전 찾은 겨울 먹거리가 황태였다. 대관령의 바람에 잘 말린 황태는 1년이고 2년이고 먹을 수 있어 판매에 용이할 것이라고 봤다. 첫해엔 3만마리를 사들여 가공했다. 최근엔 매년 25만~30만마리를 팔고 있다.
- 왜 황태였나요.
“명태는 예부터 강원도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던 어종인데요. 속초나 주문진의 어부들이 겨울마다 대관령에 명태를 가지고 와서 말리더군요. 기온·바람 등의 조건이 맞아서였죠. 20대 시절엔 일당 7만~8만원을 받고 황태 덕장에서 일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40대에 접어들면서 직접 하기로 결심했죠. 배추 농사가 끝나면 12월 중순부터 명태 덕장으로 출근합니다. 이듬해 3월 말에 거둬들인 다음 냉동창고에 저장합니다. 판매는 1년 내내 하고 있어요.”
- 여름엔 배추, 겨울엔 황태로 숨돌릴 틈이 없겠네요.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도시, 서울을 요즘 자주 갑니다. 병원 때문에요. 혈관 질환이 있어 금주한 지 16개월 됐고, 허리가 아파서 요 며칠간은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딸들이 농사일 좀 줄이라고 성화죠. 그런 볼멘소리를 들을 때 마다 농사는 정년도 없는데 벌써 관두면 어떡하냐면서 허허 웃고 맙니다. 힘닿는 데까지는 계속 농부로 살고 싶어요. 그러려면 하늘의 도움이 더 필요하겠죠. 내년엔 비가 고르게 오고 기온도 평년 수준을 되찾길 바라봅니다.”
- 이중생활은 모든 농민의 숙명인가요.
“여름엔 흙냄새, 겨울엔 생선 비린내를 맡아가며 산 세월이 어느덧 20년이 넘었네요. 농부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어요.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한 가장일 뿐이죠. 몸이 고된 건 문제가 아닙니다. 땀 흘려 키운 배추, 꽁꽁 언 손으로 널어 말린 황태를 무사히 거둬들여 소비자에게 판매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요.”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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