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로 부상하고 있는 출판 펀딩
‘옛그림으로 본 연작’은 미술사학자 최열의 30년 연구를 집대성한 시리즈물이다. 2020년 ‘옛 그림으로 본 서울’을 시작으로 펴내기 시작한 이 시리즈는 지난 5월 완간을 앞두고 있었다. 출판사 혜화 1117의 이현화 대표는 완간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 책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책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크라우드 펀딩이라는 과감한 시도를 했다. 그 결과 약 8000만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새로운 플랫폼에서 진정성을 소구한 덕이다.
와디즈 같은 펀딩 플랫폼이 책의 새로운 유통처로 주목받고 있다. 마케팅 자본이나 인력 부족으로 서점에서 높은 매출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소형 및 1인 출판사가 펀딩 플랫폼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다. 서점 중심의 유통 방식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펀딩 플랫폼이 서점의 대안으로 부상한 이유를 알아봤다.
◇1쇄로 끝날 뻔한 책의 구원투수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발표한 '2023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출판된 책 6만3000권의 평균 발행부수는 1100부에 그치는 것으로 집계됐다. 2014년의 절반 수준이다. 통상 1쇄 인쇄가 500부~1000부 내외인 것을 감안해보면, 대부분의 책은 1쇄 인쇄로 종료된다.
펀딩 플랫폼이 1쇄에 그칠 뻔한 책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자칫 사장될 뻔한 책들의 두번째 무대로 펀딩 플랫폼이 활용되고 있다. 와디즈 집계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도서 카테고리 거래금액이 2분기 대비 46% 성장했다. 같은 시기 도서 펀딩 프로젝트 수는 전년 동기 대비 45%나 성장했다.
유의미한 성공 사례도 여럿 탄생했다. 전직 교육 인플루언서 레미맘 작가의 ‘365 지능업’(너와숲 출판)은 2000명이 펀딩에 참여해 펀딩 금액 9481만원을 달성했다. 최열의 ‘옛 그림으로 본 연작’ (혜화 1117 출판)은 첫 펀딩에 7891만원의 매출을 냈다.
CJ ENM과 프런트페이지 출판사가 협업해서 출간한 ‘벌거벗은 한국사 한국 전통 수호신 에디션’의 경우 펀딩 금액 5983만원을 달성하고, 책과 굿즈를 동시에 주목해 주목받았다. 올해 와디즈 도서, 전자책 카테고리 프리오더 평균 거래 금액인 1400만원을 훨씬 웃도는 성과들이다.
◇재고 걱정이 없는 판매 플랫폼
펀딩 플랫폼이 책 유통처로 각광받는 가장 큰 이유는 기존 출판 시장의 한계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작은 출판사 입장에서 책을 먼저 생산한 후 판매하는 방식은 재고 부담이 크다. 열과 성을 다해 책을 만들어도 판매 매대를 확보하지 못하면 소비자로부터 외면 받기 일쑤다.
와디즈에서 책을 판매할 경우 이런 위험 부담을 덜 수 있다. 목표 기간이나 금액 달성 시 결제가 이루어지는 ‘선주문, 후생산’ 방식으로 판매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와디즈 관계자는 “선주문 방식이라 덩치 작은 출판사도 재고 부담 없이 판매에 도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베스트셀러보다는 ‘숨은 진주’를 발굴해 콘텐츠 하나하나를 조명한다는 점도 펀딩 플랫폼만의 특징이다. 특이한 점은 신간 보다는 구간이, 단권보다는 시리즈 도서가 주목받는다는 점이다. 또한 대중적이지 않더라도 주제가 명확하거나 팬층이 두터운 도서, 소장가치가 큰 도서가 크게 사랑받고 있다.
예컨대, 슈가슈가룬이라는 2000년대 만화책을 18년만에 복간해서 재출시한 ‘슈가슈가룬 오리지널 초판본 복간 프로젝트’는 펀딩 금액 6억3000만원 달성이라는 기록적인 성과를 냈다. 와디즈 관계자는 “와디즈 이용자들은 ‘소장하고 싶은 책’에 대한 니즈가 강한 편”이라며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펀딩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기존의 틀을 깨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는 점도 펀딩 플랫폼만의 매력 포인트다. 실제로 책과 관련된 유형의 굿즈나 행사, 앱 이용권 같은 서비스를 묶어서 론칭하는 경우가 많다. ‘벌거벗은 한국사 시리즈’는 구매욕을 자극하는 직조 책갈피와 윷놀이 세트를 결합한 상품을 출시해 눈길을 끌었다.
‘옛 그림으로 본 연작’ 시리즈는 금강산 포스터, 단원 김홍도 유람 화보집 등의 굿즈로 상품을 구성했다. 와디즈 관계자는 “독자나 소비자가 원하는 바에 맞춰 상품 구성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도서 전문 인력이 정밀하게 홍보
전통적인 유통방식에 익숙한 출판사 입장에서 펀딩으로 책을 판매하는 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와디즈는 상세페이지 기획, 마케팅, 광고, 소비자 커뮤니케이션 등을 전담하는 출판 전문 PD를 두고 있다. 와디즈 내 출판 전문 인력이 도서 발굴부터 유통까지 전 과정을 지원하기 때문에 온라인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펀딩에 도전할 수 있다.
30년 가까이 책을 만든 베테랑 편집자인 혜화1117의 이현화 대표에게도 크라우드 펀딩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 대표는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책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서 펀딩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그는 저자나 편집자 입장에서 강조할 부분을 중심으로 홍보 포인트를 잡았다. ‘알리고 싶은 것’에 방점을 찍는 전통적인 방식이다. 와디즈의 접근법은 정반대였다. 이 대표는 “독자들이 궁금해하거나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을 강조해서 홍보하는 와디즈의 방식이 가능하다는 게 신기했다”며 “새로운 영역에서 책이라는 대상을 독자들이 어떻게 만나는지 밀도 있게 학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소비자와 상호교류 할 수 있다는 펀딩 플랫폼의 장점을 활용해, 아쉬운 점을 보완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옛 그림으로 본 연작 시리즈가 도록인 줄 알고 샀다가 깊이 있는 해설에 깜짝 놀란 소비자가 있었다”며 “그가 도록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줘서, 앵콜펀딩에서는 그 부분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펀딩이 판매뿐만 아니라 소통 채널 역할까지 한 것이다.
◇종이책 시장에 변곡점이 올까
펀딩 플랫폼이 서점과는 다른 독자적인 유통처로 자리매김하면서, 소형 출판사뿐만 아니라 유명 출판사도 이들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학산문화사, 다산북스, 시공사, 돌베개 등의 출판사도 와디즈를 통해 판로를 개척하는 중이다.
크라우드 펀딩은 출판업계에 새로운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이현화 대표는 “오래 출판업에 종사한 이들이 주의 깊게 볼만한 지점이 많았다”며 “이번 기회로 새로운 유형의 의사 결정 과정, 일하는 방식을 접할 수 있어서 뜻깊었다”고 설명했다.
펀딩이 촉발한 출판시장의 변화가 축소돼가던 종이책 시장을 살리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와디즈 관계자는 “좋은 콘텐츠를 갖고 있지만 재고 부담이나 마케팅 채널 등이 부족해 빚을 보지 못한 소형 출판사에게 새로운 독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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