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계가 정신건강에 주목하는 이유
말의 몸, 사슴의 머리, 코끼리의 다리 그리고 머리에 빛나는 뿔을 가진 동물. 현실에 있을 리가 없는 상상의 동물 ‘유니콘(unicorn)’. 이제 기업 가치 10억 달러(약 1조원) 이상인 창업 10년 이하의 비상장 스타트업을 가리키는 말로 더 널리 쓰인다. 그만큼 스타트업으로 성공할 확률이 낮다는 뜻이다. 정부·지자체·비영리기관 등이 참신한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은행권청년창업재단(이하 디캠프)는 스타트업의 성공을 위해 단순히 투자금·업무 공간 지원을 넘어 창업가의 마음까지 돌보고 있다. 지난 5년간 크고 작은 스타트업 정신건강 세미나·상담을 했다. 입주 기업의 반응도 뜨겁다. 디캠프 성장팀 김보미 팀장(37), 김도완 파트장(30)을 만나 창업가의 마음을 훔치는 법을 들었다.
◇성장팀이 정신건강 세미나를 기획한 이유
김보미 팀장의 이력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스타트업’이다. 스타트업 투자사에서 4년, 스타트업에서 2년을 보내고 2019년 2월 비영리 창업 지원 기관인 디캠프에 입사했다. 디캠프는 비영리 창업 지원 기관으로, 국내 최장수 데모데이인 ‘디데이’를 매달 개최하고 입주 공간을 제공하는 등 스타트업의 전 생애주기를 지원하고 있다.
“기업성장팀에 들어가니 저 포함 팀원이 총 3명이었어요. 초기엔 기업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었죠. 그러다 '사람'에 주목하기로 했습니다. 투자사 있을 때 스타트업 대표들과 미팅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얻던 장면이 떠올랐거든요. 입주 기업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들어볼 겸 정기적인 일대일 면담을 시작했어요.”
대표의 머릿속, ‘성장’에 대한 고민 이면에는 ‘번아웃’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심리상담으로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세 명에게 듣고 난 이후 상담 프로그램 기획에 돌입했다. “처음 파일럿으로 3명에게 신청을 받아보기로 했는데 8명이 신청했어요. 어쩔 수 없이 선착순으로 마감하고 상담을 받은 3명의 후기를 들어봤더니 ‘계속하고 싶다’더군요.”
정기적으로 개최하던 세미나 주제도 손봤다. “투자·마케팅 같은 주제를 벗어나 ‘정신건강’에 초점을 맞춰 ‘디마인드(d·mind)’란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하지현 교수를 초청해 ‘불확실한 시대 나를 지키는 용기’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죠. 나름 모험이었는데 신청자가 70명이나 몰려서 깜짝 놀랐어요. 이전 세미나 신청자는 평균 30~40명 정도였고, 유명 인사를 초청했을 때도 50여 명 정도였거든요.”
◇숫자로 본 창업가 정신 건강 실태
본격적으로 정신건강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려는 시점에 코로나 사태가 덮쳤다. 오프라인 세미나는 모두 온라인으로 전환하거나 취소해야 했다. 그때 입사한 이가 김도완 파트장이다. 김 파트장은 건축 스타트업에서 콘텐츠 기획을 담당하다가 2020년 2월 디캠프 성장팀으로 이직했다.
“코로나 팬데믹 장기화 영향으로 입주 기업 대표 중 한 분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습니다. 성장팀 전체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동안 힘들었지만 우리까지 좌절하고 있을 순 없다는 생각에 프로그램 기획에 더욱 열정을 쏟았습니다.”
2020년에 이어 2021년에도 사회적 거리두기는 이어졌다. 사람들 간 교류가 막히면서 창업가들의 정신 건강도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창업을 장려해 왔습니다. 하지만 창업으로 돈방석에 앉거나 유명인이 되는 건 소수예요. 성공한 사람만 보면서 쉽게 뛰어들지만 현실은 냉혹하죠. 이런 현상에 대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 ‘연구’였어요.”
디캠프는 분당서울대병원과 함께 국내 스타트업 창업자 271명을 대상으로 정신건강 실태를 조사했다. 결과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창업자들은 일반 성인보다 스트레스나 우울감 등에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간 수준 이상의 우울을 겪는 사람은 88명(32.5%)으로 전국 성인 평균치(18.1%)보다 2배 가까이 높았다. 불안을 겪는 비율도 55명(20.3%)으로 전국 성인 평균치인 12.2%를 크게 웃돌았다.
- 창업가들의 스트레스 요인은 무엇인가요.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은 ‘자금 압박 및 투자 유치’(44.6%)로 나타났습니다. ‘조직관리 및 인간관계’(20.3%)라는 응답이 뒤를 이었죠.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은 병원을 찾지 않는 창업자가 254명에 달했다는 점이에요. ‘도움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거나 ‘치료 시간을 내기 어렵다’, ‘나약한 사람으로 비칠까 염려된다’는 이유였습니다.”
- 사업이 순항 중이라면 걱정이 덜하겠네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한 스타트업 대표가 시리즈 B(기업 가치 100억원~수백억원으로 평가되는 단계) 단계에 있는 대표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공황장애를 겪고 있다’고 털어놨대요. 그런데 그 자리에 있는 10명 모두가 공황장애를 이미 겪었거나 겪고 있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조직 규모가 커질수록 책임질 식구가 많다는 부담감이 뒤따를 수밖에 없죠.”
- 해외에서는 ‘창업가의 정신 건강’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나요.
“미국 실리콘밸리는 일찍부터 창업가의 정신건강을 주요 안건으로 다뤄왔습니다. 투자 계약서에 ‘투자금의 일정액을 창업가의 정신 건강을 돌보는 비용으로 쓸 것’을 명시하는 경우도 있죠. 미국·유럽 등 서구권에서는 ‘치료’보다 ‘예방’을 목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 우리나라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
디캠프에서는 입주 기업을 위한 1:1 심리상담이 언제나 열려있다. 창업가는 물론 임직원도 이용할 수 있다. 상주하는 심리상담사와 주 2~3회 상담할 수 있고, 원한다면 비대면 상담도 가능하다. 세미나는 격월로 열린다. 세미나가 열리기 전 홈페이지에 참여자 모집 공고가 뜨면 참여 신청을 할 수 있다.
-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작년과 달라진 점이 있나요.
“작년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를 초청했다면 올해는 ‘선배 창업가와의 대담’ 자리를 많이 마련했습니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던 선배 창업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죠. 또 세션에 따라 규모도 조절했습니다. 대규모 강연보다 10명 내외가 깊이 있는 얘기를 나누기엔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죠.”
- 반응은 어떤가요.
“1:1 심리상담 참여자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2019년 3명으로 출발해 2021년 22명, 2022년 208명이 디캠프 상주 상담가에게 상담을 받았습니다. 세미나가 끝날 때마다 만족도 조사를 하는데요. 5점 만점에 늘 4점을 넘습니다. 소규모로 하는 선배 창업자와의 대화 세션의 경우 끝나는 시간이 늘 지켜지지 않아요. 가령 정해진 시간이 오후 9시까지지만 밤 12시, 새벽 1시까지 얘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죠. 이젠 세션을 시작할 때 ‘시작 시간은 있지만 끝나는 시간은 없다’고 공지할 정돕니다.”
- 2024년엔 어떤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나요.
“아직은 방향성 정도만 잡고 있어요. 지난 10월 디마인드 워크숍에 초청했던 피플+컬쳐 김미루 대표가 제시한 ‘코칭’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멘토가 창업자에게 길을 제시해 준다면, 코칭은 창업자가 직접 찾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겁니다. 불안·무기력·우울 등에 대한 해법은 사실 비슷해요. 각자가 처한 상황에 맞춰 어떻게 적용하느냐가 관건이죠. 그 과정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창업가 마음 걱정하는 직장인
2022년 디캠프와 분당서울대병원이 발간한 ‘스타트업 창업자 정신건강 실태조사 보고서’는 스타트업 생태계에 화두를 던졌다. 스타트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창업가의 정신 건강을 돌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지난 6월 디캠프·코리아스타트업포럼·아산나눔재단·스타트업얼라이언스 등 4개 기관이 협업해 ‘창업가들의 마음상담소’를 출범하기도 했다.
- 직장인으로서 창업가의 정신건강을 돌보는 일을 하는 소감은요.
(김 팀장) “전 직장에서 정리해고 바람이 불 때 해고를 통보해야 하는 역할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 마음 건강이 바닥을 찍었던 것 같아요. 디캠프에 온 이후로는 오히려 치유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일이 힘들 때도 있죠. 세미나를 열 때마다 목표한 인원이 모여야 한다는 스트레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상처나 아픔을 돌보는 일은 모두에게 힐링이 된다는 사실을 매일 경험하고 있어요.”
(김 파트장) “저희 팀원들끼리 늘 공유하는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내가 나중에 창업하면 참여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다짐이죠.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창업가들에겐 시간이 금입니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진짜 필요하다고 느낄 법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려고 합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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