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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필터 없이 물로 정화하는 공기청정기, 20대 한국 청년이 개발했다

필터 없이 물로만, 휴대용 공기청정기 '에어 그린' 개발기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청년들이 창업에 뛰어들며 한국 경제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성장을 돕기 위해 스타트업 인터뷰 시리즈 ‘스타트업 취중잡담’을 게재합니다. 그들은 어떤 일에 취해 있을까요? 그들의 성장기와 고민을 통해 한국 경제의 미래를 탐색해 보시죠.

르노트의 권용진 대표가 물로만 공기를 정화하는 청정기 에어그린을 들고 있다. /더비비드

코로나19 이후 마스크 사용량이 크게 늘면서 필터 폐기물량이 폭증했다. 공기청정기에도 같은 필터가 들어간다. 합성 섬유 소재의 헤파필터다. 국내 필터 사용량만 연간 12만톤이 넘는다. 필터는 재활용이 불가증해 일반쓰레기로 분류하는데, 소각되면서 일산화탄소와 다이옥신 등 유해가스를 만들어낸다. 결국 오염된 공기를 걸러내는 제품이 다시 대기를 오염시키는 상황이 벌어진다.

르노트의 권용진(29) 대표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나섰다. 필터 대신 물로 공기를 정화하는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개발했다. 직접 만나 개발기를 들었다.

◇공기청정기, 물 만났다

르노트의 ‘에어 그린’은 소형 휴대용 공기청정기다. 필터 없이 물의 흡착 원리를 이용해 공기를 정화한다. 비 온 뒤 뿌연 하늘이 맑아지는 원리와 같다. 일단 기기 상단부의 팬을 통해 흡입된 오염된 공기가 물을 통과한다. 물은 공기의 오염 물질과 유해가스를 흡착하는 역할을 한다. 이후 정화된 공기가 기기 중앙부로 배출된다.

텀블러와 크기와 모양새가 비슷한 에어그린 공기청정기. /르노트

기기 하단부 물통에 종이컵 한 컵 분량의 물을 넣어 사용하면 된다. 물통 세척과 물 교체만으로 반영구적 사용이 가능하다. 필터 교체 시기가 임박하면 성능이 떨어지는 필터식 공기청정기의 고질적인 문제가 없다. USB-C타입 케이블을 이용해 전력 공급을 할 수 있다. 보조배터리, 자동차, 컴퓨터 등 다양한 전원에 연결해 쓸 수 있다.

무게가 260g으로 이동도 간편하다. 자취방 원룸, 차량, 사무실, 방 등 1~2평 남짓의 좁은 공간에 적합하다. 가습·청정화·유해가스 제거에 대한 공인 시험기관 인증을 마쳤다.

◇창업 결심하니 시대가 달라졌다

대학교를 졸업했을 때 권용진 대표의 모습. /권용진 대표 제공

부경대학교 기계설계공학과를 나왔다. 2019년 7월, 4학년 때 개인사업자를 내고 처음 창업했다. 창업 동아리에서 물을 이용한 미세먼지 정화 기술을 연구하던 것이 시초였다. “공기청정기와 일회용 마스크에 쓰이는 부직포 헤파 필터 사용을 줄여보고자 시작한 연구였어요. 공기청정기의 역사부터 공부했죠. 생각보다 길더라고요. 19세기 말 산업화가 진행되며 대기 오염이 심해지자, 미국의 프레드릭 코트렐 박사가 화력 발전소 굴뚝에 부착하는 공기청정기를 발명한 것이 시초죠. 필터의 정전기를 이용해 공기 중의 먼지를 잡아내는 원리는 지금과 같아요. 그때부터 합성섬유 필터가 계속 사용돼 온 겁니다.”

현대에 들어 황사와 미세먼지 때문에 쓰이는 필터 폐기물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필터의 집진 기술은 머리카락 굵기 100분의 1 수준의 극초 미세먼지까지 잡아낼 정도로 발전하는데, 친환경적인 필터 연구는 거의 없더군요. 소형 제품부터 친환경 기술을 적용해보고 싶었어요. 동아리 부원들과 마스크에 물 필터를 장착해 반영구적으로 사용하는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했죠.”

사업 초기 코로나19가 터졌다. 필터 폐기물 문제보다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우선순위가 되면서 사업이 주목받지 못했다. 연구하던 기술을 적용하되 폐기물도 줄일 수 있는 다른 분야를 모색했다.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 제품으로 안 나왔던 이유

'에어그린'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때 시제품 모습들. /권용진 대표 제공

공기청정기 분야가 눈에 띄었다. “마스크보다 훨씬 이전부터 헤파 필터 폐기물을 만들어내고 있던 분야죠. 더군다나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위생에 더욱 신경 쓰게 되면서 가정용 대형 공기청정기가 아닌 소형 공기청정기도 주목받게 됐어요. 공기청정기 시장에서 연구를 이어가 보기로 했어요.”

헤파 필터의 문제부터 살폈다. 폐기물 문제, 유지 비용의 문제가 있었다. “필터는 미세 플라스틱 합성 섬유로 만들어집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사용 후 재활용이 불가능해 모두 매립되거나 소각됩니다. 매립되면 썩는 데 오래 걸리고, 소각되면 일산화탄소가 발생해요. 소비자 입장에서 유지 비용도 부담이죠. 필터값만 5만원에서 최대 10만원까지 드니 만만치 않죠.”

권용진 대표가 에어그린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본체를 분리했다. /더비비드

물을 활용한 필터라면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 공기청정기의 역사가 긴데 아직도 물 필터로 제품화가 안 됐다니. 의아했다. “저만 이런 생각을 떠올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상용화된 물 필터 공기청정기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헤파 필터가 시장 주류 상품인 이유가 궁금했죠. ‘효율’이 문제였어요. 헤파 필터는 한번 장착하면 몇 개월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물은 자주 관리해줘야 했죠. 가습기처럼 물통을 닦고 물을 갈아줘야 하니까요. 물은 무게가 무거워 제품 이동도 불편했어요.”

◇제품 성능 올리는 특허 기술

물 필터의 단점을 해결할 수 있는 분야가 있었다. 소형 공기청정기 시장이었다. “좁은 공간만 정화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물통 세척이 편리하고, 가볍게 만들 수 있어요. 바로 제품 개발에 돌입했죠.”

물 한 컵을 에어그린 본체에 넣는 모습. /르노트

좁은 공간이면서 공기 청정 수요가 있는 곳. 자동차였다. “차량용 컵홀더에 딱 맞는 사이즈로 제작했어요. 자연스럽게 텀블러 모양으로 기획했죠. 원룸, 사무공간에서도 사용하기 좋아요. 침실에서도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둬서 불빛으로 상태를 표시할 수 있게끔 했습니다. 버튼 하나로 모든 조작이 가능하도록 직관적으로 설계했어요.”

제품 상단부에 팬을 설치해 외부의 오염된 공기가 유입되도록 했다. 유입된 공기가 물과 만나 유해 물질이 물에 달라붙는 원리다. “공기 통로 설계에 집중했어요. 3D 프린팅으로 수십번 튜브를 만들어 실험해봤죠. 제품 설계에 부력도 이용했습니다. 통로 끝에 작은 튜브 모양의 부품을 걸어 물의 높이에 따라 통로의 길이가 달라지게 설계했어요. 공기 통로의 끝 지점과 물의 표면이 정확히 만날 수록 공기가 물의 표면적에 닿아 여과 효과가 커지거든요.”

에어그린의 공기 정화 능력을 르노트에서 자체 실험한 모습. /르노트

물 표면에 미세먼지와 유해가스 분자가 달라붙어 공기가 정화된다. 바닥을 물걸레로 닦는 것과 같은 원리다. 물을 만나 정화된 공기가 다시 제품 중앙부 공기 배출구로 나온다. 최소 160ml에서 최대 250ml의 물을 넣어 사용할 수 있다. 수개월에 걸친 자체 실험의 결과물이다. “중형 SUV에서 실험했어요. 제품 작동 후 5분 만에 유해가스와 극초 미세먼지까지 정화되는 것을 확인했죠. 이후 공인 시험기관인 KCL에 의뢰해 제품 성적서까지 받았습니다.”

◇장인 가득한 제조업에서 청년 창업가가 살아남는 법

에어그린의 유해가스 제거율과 청정화 능력 시험성적서. /르노트

설계도를 갖고 공장을 수소문했다. 초기 생산에 1억원 가까이 들었다. “정부 지원사업으로 초기 자본을 확보했어요. 예비창업패키지, 청년창업사관학교에 선정돼 제품 제작을 할 수 있었죠. 공장은 생산 경험이 많은 국내 공장을 위주로 찾았습니다. 소비재 개발이 처음이었기에 제작 노하우가 있는 곳이 적합하겠다고 판단했어요. 높은 금형비를 감수하고도 말이죠.”

조립은 르노트에서 직접 한다. “비용 절감을 위한 선택이었어요.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 본체와 부품들을 본사로 가져와 직접 조립하고 포장하죠. 제품을 조립하면서 품질검사도 실시합니다. 부속품을 일일히 검수하고 성능을 시험한 뒤 포장하죠.”

2021년 11월 크라우드 펀딩으로 2000만원을 모아 제품 350대를 제작해 출시했다. 소비자 목소리를 가까이서 들을 기회였다. “제품 강도를 3단계로 조절했는데, 가장 약한 수면 모드조차 소음이 다소 거슬린다는 평이 있었어요. 공식 출시 제품은 수면 모드의 강도를 더 약하게 조절했어요. 30db수준으로 낮췄죠. 정숙한 도서관 소음 정도입니다.”

권용진 대표가 에어그린을 들고 웃어 보이고 있다. 에어그린처럼 친환경 제품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더비비드

쓰레기 줄이는 생활 가전을 다양하게 출시하는 것이 목표다. 주변 사람들이 알아봐 줄 때 큰 힘을 얻는다. 올해 2월 제품 공식 출시 이후 1500대 이상 판매했다. 2월 일본 크라우드 펀딩도 성공했다. 현재 대만, 인도 수출을 준비하고 있다.

창업 초보일수록 경청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품 출시는 어림도 없었을 거라고 회상했다. “특허 기술이 있다고 사업이 무조건 성공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매 단계마다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났어요. 겨우 설계도까지 완성했는데 정작 공장에선 ‘이렇게 못 만든다’는 답변을 듣는 식이죠. 벽에 부딪칠 때마다 조언을 구하러 다녔어요. 동료 창업가, 학교 교수님, 제조사 사장님을 붙잡고 의견을 들었죠. 사업에는 약간의 뻔뻔함도 필요해요.”

/김영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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