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울대 나와 베트남에서 택배 배달하며 꾼 꿈

더 비비드 2024. 7. 3. 16:33
베트남 오픈마켓 플랫폼 스타트업 창업기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마루 360에서 만난 페이얍 허경석 대표. /더비비드

스타트업이라고 무조건 작은 게 아니다. 세계 각지에 자회사를 세워 국제적 규모로 서비스를 펼치는 글로벌 스타트업들도 있다.

우리나라 스타트업 ‘페이얍’은 베트남의 오픈마켓 커머스 플랫폼 ‘리엔몰’을 운영한다. 페이얍의 허경석 대표(37)를 만나 베트남 전자상거래 시장에 주목한 이유를 들었다.

◇서울대 공대 석사 마치고 걸은 창업길

베트남 오픈마켓 플랫폼 '리엔몰'. /페이얍

페이얍은 베트남 오픈마켓 플랫폼 리엔몰을 개발해서 운영 중인 기업이다. 우리나라의 오픈마켓 사이트와 유사하다. 베트남 현지 셀러들은 리엔몰 내 자기만의 전용 스토어를 개설할 수 있다. 스토어마다 고유의 URL이 부여된다. 별도의 홈페이지를 만들 필요가 없어 영세한 개인 판매자도 쉽게 쇼핑몰 사업을 할 수 있다.

리엔몰은 베트남의 쿠팡, 11번가 같은 오픈마켓 플랫폼으로 자리매김 중이다. 현재 1만3600명의 베트남인 판매자가 리엔몰을 이용하고 있다.

허경석 대표와 박성수 COO. 둘은 학창 시절부터 친구 사이다. /허경석 대표 제공

2004년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입학해 석사까지 마쳤다. “빌 게이츠를 동경했어요. 아직 어린 1990년대 말, 마이크로소프트의 컴퓨터 운영체제가 전 세계인에게 주는 영향을 보고 충격받은 경험이 있거든요. 마침 한국도 IT기업 창업이 유행처럼 번지는 시기였죠. 그때부터 창업가를 꿈꿨습니다. 전공도 창업을 고려한 선택이었죠.”

경험을 쌓기 위해 뛰어든 사회생활은 창업의 기폭제가 됐다. 2010년 석사 졸업 후 전문연구요원(병역대체복무제도의 일종)으로 40개월간 통신사의 개발 협력사에서 근무했습니다. 당시 애플의 아이폰이 국내에 상륙한 막 시점이었어요.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순식간에 바꾸는 것을 산업 측면에서 봤죠. 저도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주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어졌어요.”

2014년 30살에 스타트업을 처음 창업했다. "전화번호를 바탕으로 지인 관계를 관리 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했어요. 명함 관리 앱 ‘리멤버’와 유사한 개념이죠. 하지만 서비스의 성장이 더뎠어요. 고민 끝에 2015년 친구가 운영하던 중고 거래 플랫폼 스타트업과 합병했습니다.”

카카오모빌리티에서 근무했던 허경석 대표. /허경석 대표 제공

첫 스타트업 생활은 짧았다. 1년 만에 카카오에 인수됐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를 높게 평가한 카카오가 기업을 인수하고, 전 직원을 카카오의 구성원으로 고용했어요. 저는 2019년 3월까지 카카오모빌리티 사업팀에서 근무했습니다. 기사 관리, 서비스 정책 수립, 업체 협업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죠.”

IT기업에 종사하면서 직접 개발한 서비스를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2019년 4월 퇴사 후 5월 동업자 2명과 함께 페이얍 법인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전자상거래용 결제 플랫폼을 개발했습니다. 그런데 사업 무대를 우리나라로 하자니 승산이 없겠더군요. 관련 서비스가 이미 포화 상태였거든요. 전자상거래가 아직 발달하지 않은 곳에서 한발 앞서 서비스를 내놓는 전략이 나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어요.”

◇베트남에서 발견한 특이점

페이얍 호찌민 지사 준비 모습과 마루 360에서 만난 페이얍 허경석 대표. /더비비드, 허경석 대표 제공

무대는 베트남으로 정했다. “우리나라보다 전자상거래 시장이 덜 발달했지만, 잠재 소비자가 많은 나라거든요. 베트남의 전자 상거래 비중은 전체 소비 시장의 5% 수준에 그칩니다. 아직 미미하죠. 그런데 성장률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구글 자료에 따르면 2018년 이후 베트남 전자상거래 시장은 연간 43%씩 성장하고 있어요. 여기에 1억명에 육박하는 베트남 인구 중 70%가 생산가능인구(15세~64세의 인구)입니다. 성장세가 계속 될 것이란 뜻이죠.”

2019년 12월, 허 대표는 박성수 COO(최고운영책임자)와 함께 베트남으로 떠났다. “베트남에 머무르며 여러 개인 판매자를 만나보고, 온라인 사업 구조에 대해 자세히 익혔습니다. 이후 COO는 호찌민에 남아 지사 설립을 준비했습니다. 베트남 사업자 등록 등 법적 절차를 마치고, 사무실을 구했죠. 베트남 현지 개발자와 마케팅 담당자도 채용했어요. 채용 과정에서 많은 베트남 청년을 만났는데요. 현지 전자상거래 동향이나 소비 성향을 많이 물어봤습니다. 저절로 시장조사가 됐습니다.”

직접 방문해 시장조사를 해보니, 특이한 점이 보였다. “베트남에는 우리나라의 네이버나 다음 같은 자국 포털사이트가 없어요. 그 역할을 페이스북이 하죠. 베트남 페이스북 앱 가입자가 8500만명이 넘어요. 그야말로 ‘국민 앱’이죠. 전자상거래는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진행됐어요. 우리나라 포털 커뮤니티에서 공동구매, 중고 거래 같은 상업 활동이 일어나는 것과 유사하게 베트남은 페이스북의 그룹과 메신저에서 상거래가 이뤄졌죠.”

초기 사업 모델 '슬립온' 작동 화면. /허경석 대표 제공

페이스북 메신저 내에서 전자상거래를 돕는 챗봇 서비스를 고안했다. 서비스 개발 단계에서 정주영 창업경진대회에 참가해 대상을 차지했다. 상금으로 창업 비용을 충당했다. “팁스, 스프링캠프, 아산나눔재단으로부터 초기 자금을 받아 운영했습니다. 베트남 시장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현지에 공동 창업자가 상주하고 있다는 점이 좋게 작용했죠. 베트남에서 사업을 펼치는 우리나라 기업은 많지만 현지화는 쉽지 않거든요."

2020년 12월, 커머스용 챗봇 서비스 ‘슬립온’을 선보였다. 리엔몰의 전신이자 베타 버전이다. “페이스북에서 제공하는 오픈 API(응용 프로그램이 페이스북 기능을 활용하도록 지원하는 기능)를 활용해 만들었어요. 메신저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챗봇입니다. 판매자가 슬립온 홈페이지 가입 후 챗봇의 메신저 답변 권한을 허용하면, 슬립온이 알아서 소비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주는 방식이죠. 현지 직원을 채용해 소비자가 자주 하는 질문을 분석하고 알고리즘을 구축했어요. 기본적인 고객 응대만 자동화해도 판매자의 공이 줄어요. 24시간 응대도 가능하고요. 베타 출시 기간에는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해 회원을 모으는 데 집중했습니다. 2021년 3월까지 400명의 회원을 모았죠.”

◇두 번의 베타 거쳐 정식 버전 출시

리엔몰 앱 화면. /페이얍

챗봇만으로 폭발적인 성과를 내기는 어려웠다. “페이스북에 기생하는 서비스였다는 점이 가장 큰 한계였어요. 페이스북의 운영 방침에 따라 회사의 명운이 갈리는 구조였죠. 챗봇의 한계도 있었어요. 상세 페이지로 정보를 얻는 국내 소비자와 달리, 베트남은 관계 지향적 소비를 하더군요. 구매 의향이 있는 소비자 대부분이 판매자와 소통과정을 거치고 구매를 결정해요. 챗봇으로 자동화할 수 없는 질문들이 많았죠.”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독자적인 서비스가 필요했다. 2021년 3월, 서비스명을 ‘리엔몰’로 바꾸고 두 번째 베타 버전을 공개했다. 온라인 판매자가 리엔몰 홈페이지에 들어와 별도의 웹 주소를 가진 자신의 스토어를 개설할 수 있는 서비스다. “판매자가 스토어를 쉽게 개설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했어요. 소비자에게는 URL 형식으로 판매 창구를 공유할 수 있죠. 스토어 개설은 물론이고 상품 등록과 상세페이지 입력도 간편합니다.”

관계 지향적인 베트남 소비자의 특성은 그대로 고려했다. “챗봇으로 해결하지 못한 궁금증은 상세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URL을 소비자에게 남기는 식으로 조정했어요. 만약 소비자가 상세페이지와 상품 정보를 보고 질문이 생기면, 그때 직접 판매자에게 물어보면 되는 거죠.”

허 대표와 베트남 현지 직원들. 현지 직원의 결혼식을 방문할 정도로 사이가 돈독하다. /허경석 대표 제공

셀러들 사이에 반응이 좋았다. 챗봇에서 스토어 개설 서비스로 업그레이드한 지 3개월 만에 판매자 회원이 1만명 가까이 늘었다. “서비스 이용료가 없어 판매자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었어요. 추후 결제가 발생할 때 2% 수준의 수수료를 받을 계획입니다. SNS에서 최소한의 광고만 집행했는데도 회원이 빠르게 늘었어요."

사업 확장을 향해 질주하던 중 고생길이 펼쳐졌다. “코로나19로 국경이 봉쇄되면서 해외 사업을 펼치는 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동안 한국에 7명, 베트남 호찌민 지사에 6명의 직원을 두고 서비스를 운영 중이었는데요. 지난해 5월부터 6개월간 호찌민에 봉쇄령이 내려졌습니다. 공동 창업자 중 한명이 베트남 현지 지사장으로 있는데, 그 기간 동안 귀국은 당연히 못 했고, 한인 마트도 못 가 한 달 동안 참치김치찌개만 먹었다고 합니다."

직접 배달도 했던 허경석 대표. /허경석 대표 제공

리엔몰도 타격을 입었다. "봉쇄로 택배 물류업이 마비됐습니다. 사실상 서비스가 중단된 거죠. 6개월 동안 투자금을 소진하며 데스밸리(스타트업 경영 과정에서 소득은 없고 지출만 있는 시기)를 지났습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서비스 정비에 돌입했다. “판매자들이 제작한 개인 스토어를 한 데 모으면 그게 오픈마켓이 되잖아요. 오픈마켓을 열면 페이얍 PB상품(유통업체가 자사 이름으로 출시하는 상품)도 판매할 수 있고, 현지 인플루언서와 협업하는 등 더 다양한 사업을 꾸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21년 말 출시를 목표로 리엔몰을 셀러 전용 쇼핑몰 창업 및 관리 소프트웨어에서, 판매자와 소비자가 교류하는 ‘오픈마켓’으로 확대하기로 결심했어요."

◇해외 시장에서 성공하는 두 가지 비결

리엔몰에 대해 설명하는 허경석 대표. /더비비드

2021년 12월, 리엔몰 정식 서비스를 출시했다. 베트남의 주목받는 오픈 마켓으로 성장하고 있다. 판매자가 리엔몰에서 개설한 스토어를 한곳에 모은 개념이다. 리엔몰 내 다양한 스토어의 구매 내역을 모아서 관리할 수 있다. 웹페이지나 앱을 통해 접속하면 된다. 페이얍은 결제 수수료를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

등록 현지 판매자가 1만3600명을 넘어섰다. 아직 거래규모는 미미하다. 월평균 거래 건수는 2000건, 월평균 거래액은 4억동(한화 2100만원) 수준이다. “베트남의 국내총생산(GDP)이 대한민국이 6분의 1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한화 기준으로 월 1억원 수준의 매출을 내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성장을 위해 소비자 유입에 집중하고 있다. “베트남 유명 유튜버 등 현지 인플루언서와 협업한 판매 활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베트남 판매자의 편의를 위한 보조용 프로그램으로 활용됐다면, 이제는 베트남 셀러와 소비자의 접점을 본격적으로 확대하려 해요.”

코로나19 이후 동료 기업이 줄이어 귀국하던 중에도 보릿고개를 버틸 수 있던 원동력으로 ‘현지화’와 ‘린(Lean) 전략’을 꼽았다. “공동 창업자가 호찌민에 계속 머무르며 베트남 직원과 일하는 등 현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리엔몰이 회원을 빠르게 늘릴 수 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베타 버전을 우선 출시한 후 동향을 봐가며 제품을 고도화하는 ‘린 전략’도 한몫했습니다. 출시를 해봐야 발견할 수 있는 문제들이 많아요. 특히 다른 문화권에서 사업을 운영하면 더 그렇죠. 서비스의 상품성을 높인다는 이유로 출시를 늦췄다면  베트남의 전자상거래 특징 등 현지 사정을 이렇게 알지 못했을 겁니다.”

/김영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