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밥상 위 천덕꾸러기? 한국 토종 쌀의 대변신

더 비비드 2024. 6. 27. 10:10
충남 당진의 전국 최대 규모 미곡종합처리장(RPC) 탐방기

당진시농협쌀공동조합법인 김이섭 대표가 충남 당진 해나루쌀 20㎏ 한 포대를 번쩍 들었다. /더비비드

‘한국인은 밥심’이라 했던가. 기운을 내지 못할 때, 갓 지은 쌀밥에 매콤한 김치 한 쪽만 올려 먹어도 불끈 힘이 솟는다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영 힘을 내지 못하는 게 이 때문일까. 다이어트, 혈당 관리 등을 이유로 쌀밥을 멀리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탄수화물 함량이 높다며 대체 식품을 찾아 나서는 지경이다.

옛말에 틀린 말 하나도 없다. 쌀밥은 우리 몸에서 건강한 에너지원이 된다. 이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쌀을 가장 많이 생산한다고 알려진 충청남도 당진시를 찾았다. 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평생 쌀을 연구한 박사에게 쌀의 영양학적 가치도 물었다. 쌀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파헤쳐 봤다.

◇해풍 맞고 자란 당진 쌀

넓은 평야 지대로 이루어진 충남 당진. /더비비드

충남 당진은 넓은 평야 지대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일조량이 풍부하고 9~10도 정도의 일교차 덕분에 쌀 생육의 최적지로 평가받는다. 당진의 간척지 평야의 토질은 점질토로 논 재배에 적합하다. 해나루쌀은 당진의 고품질 쌀 브랜드다. 비나 바람에도 잘 쓰러지지 않고 도열병·잎마름병 등 병충해에도 강한 삼광벼를 재배해 수확한 쌀이다.

해나루 쌀은 생산·수매·보관·가공·유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엄격한 기준에 따라 관리한다. 그 중심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당진시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이하 당진 RPC)’이 있다. 볏짚·규산질·게르마늄 등을 활용한 농법으로 육묘·재배하고 현대화된 미곡 종합 처리시설에서 도정·가공한다. 쌀알의 모양이 작거나 깨지는 등 기준치에 미달하는 쌀알을 크기별로 선별해 밥맛 좋은 완전미만을 선별한다. 이와 같은 RPC는 전국 131개가 있는데, 신선한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전국 최대 규모 미곡종합처리장

충남 당진시 우강면의 제2통합 미곡종합처리장. /더비비드

당진시 우강면에 위치한 RPC에 들어서자 마치 거대한 공장 단지를 보는 듯했다. 당진 RPC 전체 전경을 찍으려 했지만 워낙 규모가 커 카메라에 담기조차 쉽지 않았다. 뒤편으로 한참을 뛰어갔다. 그제야 카메라 프레임에 모든 건물이 담겼다. 그도 그럴 것이 당진 RPC는 부지면적 약 8864평(2만 9302㎡)에 건축면적 약 2156평(7128㎡)으로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당진시농협쌀공동조합법인 김이섭 대표(56)의 안내에 따라 쌀 가공 과정을 살펴봤다. 마침 25톤 규모의 대형 워킹카가 벼를 옮기는 중이었다. 자리에 맞게 후방 주차한 다음 벼를 뒤편으로 흘려보내는 방식이다. 2023년 한 해에만 약 6만2000t(톤)의 벼가 당진 RPC에 들어왔다.

25톤 규모의 대형 워킹카가 벼를 옮기는 모습. 트럭의 뒤편에서 벼가 아래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다. /더비비드

RPC에 들어온 벼는 저온 창고에 보관된다. 품종에 따라 정도는 다르지만 2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오래 보관하면 쌀의 품질이 떨어진다. 이 대표는 “초봄까진 창고에 넣어두기만 해도 10도 이하로 유지되지만, 3월 이후엔 냉각 송풍기를 가동해 15~20도 사이로 온도를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커다란 철문을 열자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다른 점이라면 찰나가 아니라 끊임없이 소음이 이어진다는 점. 시간당 5t씩 가공할 수 있는 백미 도정기와 6t씩 가공하는 현미 도정기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백미·현미 가공 라인은 각각 3개로 시간당 최대 생산량은 15t, 18t에 달한다.

돌·금속 등 이물질을 먼저 제거(왼쪽)한 뒤 도정을 해 현미와 백미가 나온다. /더비비드

안쪽에서 벼가 투입되면 먼저 돌·금속 등 이물질 제거 작업이 이뤄진다. 1차 도정을 해 현미를 만들고, 현미가 다시 백미 공정으로 들어가 2차 도정을 거쳐 백미로 나온다. 이 대표는 “갓 도정한 쌀은 이렇게 따뜻하다”며 현미와 백미를 차례로 꺼내 보였다. 도정을 마친 쌀들은 배관을 타고 포장실로 이동한다. 최종 관문인 금속검출기까지 통과하면 로봇팔로 포장돼 대형마트, 온라인몰 등으로 출고된다.

백광열 과장(왼쪽)과 한경진 과장이 어깨 동무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더비비드

당진 RPC는 규모에 비해 직원 수가 25명으로 적은 편이다. 현대화·기계화·자동화 시스템이 갖춰진 덕분이다. 직원들의 자부심까지 작지는 않다. 당진 RPC에서 공장장을 맡고 있는 백광열 과장(54)은 “당진은 논농사에 딱 맞는 자연조건을 갖췄다”이라며 “기온·일조량·일교차·배수 환경까지 농사를 도와준다”고 설명했다. 운영총괄을 맡고 있는 한경진 과장(56)은 “농가들과 계약재배를 통해 균일한 품질을 관리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근육 증가를 원한다면 오늘부터 밥 한 공기씩

우리나라 쌀의 품질이 올라가는 것과는 반대로 소비량은 갈수록 줄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나라 쌀의 품질이 올라가는 것과는 반대로 소비량은 갈수록 줄고 있다. 통계청의 양곡소비량조사 결과를 보면 1인당 쌀 소비량은 2018년 61㎏, 2020년 57.7㎏, 2023년 56.7㎏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가장 큰 원인으로는 ‘쌀밥에 대한 인식 변화’가 꼽힌다. 탄수화물 함량이 높다는 이유로 체중 증가의 주범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쌀밥의 영양학적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국립식량과학원 곽지은 박사·연구사(50)를 찾았다. 아래는 곽 박사와의 일문일답이다.

- 쌀밥은 정말 다이어트의 적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쌀은 탄수화물 외에도 단백질, 무기질, 비타민, 식이섬유 등을 함유하고 있어 영양학적 조성이 우수한 식품입니다. 쌀밥 그 자체가 여러 가지 부식과 잘 어울리잖아요. 다양한 부식과 함께 밥을 섭취하면 부족한 영양소가 보완돼요. 쌀밥을 기본으로 하는 식단을 섭취한 건강한 성인은 혈당이 완만하게 감소하고, 인슐린 분비가 적습니다. 당뇨 전 단계 성인에게선 체중, 허리둘레, 중성지방 등 수치가 감소하는 결과도 확인했고요. 따라서 무조건 쌀밥 등 탄수화물을 기피할 것이 아니라, 균형 잡힌 식단으로 정해진 양만큼 골고루 섭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밥 그 자체가 여러 가지 부식과 잘 어울린다. 다양한 부식과 함께 밥을 섭취하면 부족한 영양소가 보완된다. /게티이미지뱅크

-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면 지방을 감량할 수 있지 않나.

“탄수화물로부터 포도당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으면 우리 몸은 지방이나 단백질에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젖산, 글리세롤, 아미노산으로부터 포도당을 합성하거나 지방에서 유도된 케톤체를 뇌의 에너지로 사용하죠. 이런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면 케톤체가 몸속에 쌓여 체액이 산성으로 바뀌는 ‘케톤증’의 위험이 있습니다. 하루 100g 이상의 탄수화물을 섭취해야 체내 단백질을 절약하고 케톤증, 심한 수분 손실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200g 즉석밥 1개에 포함된 탄수화물이 약 70g인데 하루 활동량을 고려할 때 삼시세끼 먹어야 합니다.”

- 근육 증가엔 ‘단백질’이 더 필요하지 않나.

“일반적으로 탄수화물과 지방은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고, 단백질은 우리 몸의 세포와 골격을 구성하고 성장 발달을 위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탄수화물 섭취가 부족할 때는 단백질을 분해해 에너지를 얻는 데 사용하게 됩니다. 애써 먹은 닭가슴살이 근육을 만드는 데 활용되지 못하고 에너지원으로 쓰인다는 뜻이죠. 따라서 단백질 손실을 예방하기 위해 탄수화물도 함께 섭취해야 합니다.“

단백질 손실을 예방하기 위해 탄수화물도 함께 섭취해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살을 빼려면 찬밥을 먹어야 한다’는 말은 낭설인가.

“결과부터 말하자면 찬밥으로 다이어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먹는 밥은 쌀에 물을 넣고 가열하여 전분의 호화 단계를 거쳐 소화가 잘되는 형태로 조리한 식품인데요. 밥을 식히면 소화가 잘되지 않는 ‘저항전분’의 양이 증가합니다. 저항전분은 탄수화물을 구성하는 식이섬유의 일종으로 사람의 소장에서 소화 흡수되지 않아 열량이 매우 낮은 편이죠. 100g의 양을 기준으로 갓 지은 밥의 저항전분 함량이 0.64g일 때 찬밥은 1.654g으로 증가하지만 저항전분 함량 자체가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소화능력이 약한 사람은 소화 불량 등 부작용을 겪을 수도 있어요.”

- 쌀밥 대신 곤약·콜리플라워 등 대체 식품을 찾는 이가 늘었다.

“곤약과 콜리플라워 모두 열량이 매우 낮은 식품으로 다이어트를 위해 많이 섭취되고 있죠. 하지만 과다 섭취 시 지나친 포만감, 복부팽창, 복부 가스 등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또 열량으로 사용되는 영양소는 거의 없이 대부분 식이섬유와 수분으로만 이루어져 영양 불균형을 부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기간 단일 섭취보다는 포만감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 섭취할 것을 추천합니다.”

◇해외로 뻗어나가는 K-라이스

밥심을 알리기 위해 세한대학교 당진캠퍼스에서 펼친 '행복미밥차' 행사 모습. /농협경제지주

쌀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농협은 다양한 홍보, 마케팅 활동을 하고 있다.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다. 우리 쌀로 만든 백설기 떡을 나누는 3월 14일 백설기 데이, 벼가 이삭을 내는 시기인 8월 18일 쌀의 날, 초콜릿 과자 대신 기념하는 11월 11일 가래떡 데이 등 '데이 마케팅'이 대표적이다. 누구나 부담 없는 가격에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정부와 협의해 편의점 도시락 등을 내놓는 모두의 아침밥 캠페인도 있다.

강호동 농협중앙회장이 어린이들과 함께 전통 모내기 체험을 하고 있다. /농협중앙회

국립농업박물관에서 쌀을 이용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쌀벤저스 요리교실' 등 교육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강호동 농협중앙회장은 "어렵고 배고픈 시절, 따뜻한 밥 한 끼가 주는 위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라며 “농협은 우리민족의 주식인 쌀의 귀중함을 되새기고 삼시세끼 밥심으로 더 건강한 대한민국이 될 수 있도록 쌀 소비촉진 홍보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쌀 소비가 촉진되려면 다양한 제품 구색을 갖춰야 한다. 농협식품R&D연구소는 가루쌀을 이용해 '농협쌀칩'이라는 스낵을 만들었다. 가루쌀은 품종 '바로미2'를 말하는데, 쌀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하고 밀을 대체하기 위해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했다. 가루쌀은 일반 쌀과 영양 성분은 동일하지만 전분 구조가 밀과 비슷해 물에 불리지 않고 바로 제분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체질에 따라 알러지나 소화 불량을 일으키는 '글루텐'이 없어 가장 효과적인 밀가루 대체재로 부상 중이다. 여러 회사에서도 가루쌀을 이용한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농심·오뚜기·사조식품·대상 등 식품업체를 비롯해 런던베이글, 성심당 등 유명 베이커리까지 뛰어들며 쌀 소비 촉진에 힘을 더하고 있다.

농협식품R&D연구소가 개발한 가루쌀과 가루쌀로 만든 스낵들. /더비비드

알고보면 우리나라 쌀은 해외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2024 한·아프리카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한·아프리카 농업 콘퍼런스’에서 K-라이스벨트(한국형 쌀 생산벨트) 구축사업 사업은 주요 의제 중 하나였다. 과거에는 최종 제품인 쌀을 공급했다면, 최근엔 식량 위기 극복을 위해 쌀 품종 공동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23년에는 아프리카 가나 등 6개국에서 시범 생산에 착수해 벼 보급종 2000t을 생산했다. 오는 2027년 다수확 벼 종자 1만t을 생산하고 농가에 보급해, 연간 약 3000만명이 소비할 수 있는 쌀을 생산토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