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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인생의 나락까지 갔던 남자, 최악의 순간 내린 선택의 결과

보호종료 청소년 위한 금융교육 기업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부모 대신 국가의 보살핌을 받는 청소년들은 만 18세가 되면 보호 시설을 떠냐야 한다. 이런 보호종료 청소년들은 대부분 제대로 금융교육을 받지 못한 채 세상으로 내몰린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보호종료청소년의 절반 이상인 59.5%가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했다. 얼마 안 되는 지원금마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위코노미 이영웅 대표. /더비비드

2013년 설립된 ‘위코노미’는 이런 청소년과 청년에게 금융 교육과 진로 상담을 제공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작년까지 9000여명의 자립준비청년이 위코노미를 거쳐 갔다. ‘서울시 희망두배 청년통장’과 ‘경기도 청년 노동자 통장’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 금융 교육도 담당하고 있다. 이영웅(41) 대표에게 창업기를 묻자 스스로 힘들었던 시기부터 떠올렸다.

◇군대에서 입에 손전등 물고 공부한 사연

‘50명 중 35등’ 하면서 스스로 서울대에 갈 거라 믿었던 고등학생이었다. 여느 아이처럼 철없는 발상을 하며 살았지만, 현실은 장밋빛 인생과 거리가 멀었다. 결국 성적에 맞춰 지방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좌절감에 빠졌다.

군 시절 독학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본인 제공

-어떤 20대를 보냈나요.

“2년 동안 대학교 강의실에 출석 도장 찍으러 간 일 조차 손에 꼽아요. 어머니가 운영하던 음식점을 돕다가 25살에 입대했어요. 그때 군대에서 알게 된 형에게 검정고시로 학사 학위를 딸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독학학위제’라는 제도였는데, 솔깃했죠. 전역 후 인생이 막막하기도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아까웠거든요. 군 생활 내내 점호 후에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입에 손전등을 물고 공부했어요. 2008년, 전역증과 함께 경영학사 학위를 손에 쥐었습니다.”

-전역 후엔 어떻게 지냈나요.

“맏이인데, 군대에 있을 때 둘째는 스무 살, 막내는 초등학생이었어요. 그때 아버지 사업이 잘 안 풀렸고, 어머니 가게도 장사가 안됐어요. 어머니 가게를 도왔을 때  금융지식이 부족해서 고전했어요. 권리금 1억원을 내고 가게를 차렸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폐업의 원인이 된 것 같아요. 그러다 두 분이 이혼까지 하셨죠. 동시에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어머니도 술에 의존하시게 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습니다. 동생들을 책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게 됐나요.

“2008년, 친구가 다니고 있던 ‘포도재무설계’에 자산관리 상담사로 입사했어요. 건당 수수료를 받는 식이어서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했어요. 해 뜨는 걸 보면서 퇴근하는 경우가 허다했죠. 5년 동안 몸을 혹사하다 보니 번아웃(burnout)이 왔어요. 병원에 갔더니 고도 우울증이라 하더라고요. 이렇게 회사 생활을 지속하면 큰일 나겠다 싶었어요.”

◇퇴사 후 뛰어든 교육업, 남 일 같지 않은 현실 발견

한 학교에서 웃으며 강의 중인 이 대표. /본인 제공

주어진 일을 기계처럼 하는 생활을 내려놓고 주도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2013년 11월, 회사 동료 두명과 함께 위코노미의 전신인 ‘한국금융교육자문’을 설립했다.

-금융교육 사업을 구상한 이유는요.

“첫 직장의 연장 선상이었어요. 실적 압박에서 벗어나 사람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상담’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작은 상담소로 시작했어요. 이윤을 크게 따지지 않고 개인회생, 파산 상담을 진행했어요.”

자립준비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저축 통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위코노미 공식 블로그 캡처

-보호종료 청소년에게 주목한 계기는요.

“법인 설립 이듬해, 서울시 아동자립지원단으로부터 보호시설 퇴소를 앞둔 청소년 대상 금융교육을 진행해달란 요청을 받았어요. 어린 시기를 어렵게 보낸 기억이 있어 남 일같지 않더라고요. 교육을 갔는데 현실은 참담했어요. ‘누가 지원금을 가장 빨리 쓰나’ 내기하는 아이들도 있었죠. ‘금융사각지대의 끝판왕’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당장 적용할 수 있는 ‘부동산 계약하는 법’, ‘저축하는 법’부터 가르쳤죠.”

-회사 운영은 잘 됐나요.

“5년간 사업 확장을 안 했어요. 이윤만 노리고 회사를 운영한 게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남는 게 너무 없었어요. 2019년 2월엔 사무실 월세 낼 돈조차 없었죠. 결국 처음 창업했던 동료와 직원들 모두 떠나고, 저와 이동욱 수석 컨설턴트 둘만 남았어요.”

◇4전 5기 도전 끝에 얻은 절호의 기회

2019년, 위코노미의 교육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더비비드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회사 운영에 박차를 가했다. ‘우리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경제’라는 의미를 담아 사명도 ‘위코노미’로 변경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나요.

“먼저 ‘나라장터(공공기관의 사업에 참여할 업체를 선정하는 전자 입찰 시스템)’에 사업 제안서를 냈어요. 2019년에만 4번 지원했는데 모두 탈락했죠. 다 접고 싶은 마음을 참고 이듬해 1월에 5번째 제안서를 냈어요. 그때 기적적으로 경기복지재단의 ‘청년노동자통장 교육개발’ 사업을 맡게 됐어요. 통장을 막 개설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금융교육인데, 지금까지도 진행하고 있어요.

이를 발판으로 공공기관에서 시행하는 청년 대상 금융교육과 자립준비청년 금융·진로 교육 담당 기업으로 선정됐어요. 경기복지재단을 시작으로 서울시복지재단, 아동권리보장원, 한국아동복지협회 등에서 금융교육을 시행했죠. ”

온라인 강의 영상 촬영 중인 이 대표. /위코노미 공식 블로그 캡처

- 주된 교육 내용은 뭔가요.

“돈을 대하는 태도와 경험, 금융 지식. 삼박자가 잘 맞도록 교육합니다. 사회에 막 발을 들인 청년들에게는 생애 주기별 예산 설계 방법, 보험을 선택하고 활용하는 법, 디지털금융사기 예방법 등을 가르쳐요. 기초 교육을 통해 화폐와 금융 전반에 대한 지식을 쌓으면, 주식·투자 등을 통해 경험을 쌓으라고 조언하죠. 자립을 준비 중인 청년에게는 적금 드는 법 같은 실용적인 금융지식부터 진로 멘토링까지 진행해요. 이 교육을 받고 자립한 아이들이 ‘자립선배’가 돼 후배들에게 조언을 주기도 하죠.”

-인상 깊은 순간이 있다면요.

“어느 날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변호사 배지를 단 청년에게 인사를 받았어요. 처음엔 못 알아봐서 누구냐고 묻자 보호시설에서 퇴소할 때 제 강의를 들었다 하더군요. 그제야 기억이 났어요. 오랜 세월이 흘러 잊고 있던 학생인데 변호사가 됐더라고요. 제가 그 청년을 변호사로 만들었다고 할 순 없겠지만, 가슴이 벅찼습니다. 교육은 한 사람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메타버스 교육 콘텐츠 구상, 벤처기업이 목표

위코노미 운영진,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좋은 인재와 함께 사회적 가치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본인 제공
/본인 제공

올해, 고용노동부로부터 '사회적 기업'으로 인정받았다. 지난 10월에는 ‘서울시 영테크’ 청년 재테크 컨설팅 전문기관으로 선정됐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청년을 대상으로 화상 금융 상담을 제공하는 6억원 규모 사업이다.

-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

“스스로 좋은 리더라고 자부할 순 없지만,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2년째 주 30시간 근무제도 시행하고 있죠. 사업이 더 확장되면 위코노미를 벤처기업으로 키우고 싶어요. 메타버스(metarverse, 3차원 가상세계)를 통한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는 사업도 생각 중입니다.”

-창업을 생각하는 분들을 위한 조언이 있다면요.

“회의에서 뭔가 결정되면 무조건 6개월은 끌고 나가요. ‘성과가 없다, 반응이 안 좋다’ 등의 이유로 사업을 포기하면 될 일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일관된 목표를 갖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간 빛을 볼 날이 올 거예요.”

/장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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