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대기만 했는데 화면 변신.. 삼성전자·디즈니가 반한 한국 스타트업

2025. 11. 10. 13:44인터뷰

슬래시비슬래시 정용채 대표

슬래시비슬래시 정용채 대표가 크록스와의 협업으로 제작한 휴대폰 케이스를 보여주며 미소 짓고 있다. /더비비드

디자인은 그에게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언어’였다. 삼성전자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은 정용채(40) 대표는 이성의 영역인 기술과 감성을 잇는 디자인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식재산권(IP) 기술 스타트업 슬래시비슬래시(SLBS)를 창업해 틈새시장을 정조준했다. 팬덤이 두터운 IP를 기술과 결합해 휴대폰 주변 기기와 굿즈를 만들고 이를 브랜드의 마케팅 툴로 재탄생 시켰다. 틈새 전략으로 삼성전자, 디즈니, 산리오 등 굵직한 파트너사를 끌어모았다. 정 대표를 만나 디자인으로 시장의 언어를 새롭게 쓰는 법에 대해서 들었다.

◇삼성 출신 디자이너의 도전

출시 후 호응을 얻고 있는 크록스 케이스 시리즈. /슬래시비슬래시

2020년 7월 설립한 SLBS는 IP(캐릭터 등 지적재산)에 근거리무선통신(NFC), 블루투스, 인공지능(AI) 등의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제품군을 창조하고 있다.

휴대폰 케이스가 대표적이다. 디즈니, 크록스 등 회사와 협업해 이들이 가진 캐릭터를 활용했다. 휴대폰에 케이스를 끼우는 순간 휴대폰 배경화면 등이 해당 캐릭터 위주로 바뀐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로 휴대폰을 꾸밀 수 있는 것이다.

휴대폰 케이스로 시작된 사업은 현재 가방, 의류, 굿즈, 응원용품 등 다양한 카테고리로 확장하고 있다.

주요 고객사는 삼성전자,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국내외 대형 제조사와 통신사다. 디즈니, 포켓몬, 산리오, 케이팝 아티스트 등 150개 이상의 IP를 보유하고 있다. 탄탄한 고객사와 두툼한 팬덤의 IP를 동시에 확보한 덕에 2024년 연매출 250억원을 달성했다.

정용채 대표는 삼성디자인교육원(SADI)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한 후 삼성전자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더비비드

SLBS의 정용채 대표는 삼성맨 출신이다. 삼성디자인교육원(SADI)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한 후 삼성전자에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SADI에서 삼성산학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삼성의 프로세스와 지향점을 체득했습니다. 소중한 경험이었죠. 삼성전자 입사 후 갤럭시 S1부터 S8까지 UX 디자인을 담당했습니다. 갤럭시의 소프트웨어 기틀을 설계하는 일이었는데요. 브랜드 가치와 플랫폼의 편의성을 동시에 고려하며 운영체제(OS)에 최적화된 사고를 함양할 수 있었습니다.”

디자이너가 천직이었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고 싶었다. 삼성전자 퇴사 후 2018년 디자인 에이전시를 열었다. “시각 자료, 제품, 공간, 애플리케이션(앱) 등을 두루 아우르는 토탈 디자인을 기업에 납품했습니다. 에이전시는 잘 됐어요. 유명 대기업 및 증권사부터 스타트업까지 업종과 기업 규모를 망라하고 10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죠. 하지만 여전히 갈증을 느꼈습니다. 디자인의 가치를 폭발적으로 증폭할 수 있는 일이 하고 싶었어요.”

◇디즈니를 설득한 한국 스타트업

NFC를 적용한 스마트 프로덕트 구동 방식을 보여 주는 정 대표. 하단의 카드를 휴대폰에 대면 화면이 알아서 바뀐다. /더비비드

디자인 에이전시가 아니라 디자인 기반 스타트업으로 재도전하기로 했다. 그가 주목한 건 소비재다. 소비재는 디자인을 직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그릇이자, 소유욕을 자극하는 수단이다. 삼성전자 재직 시 휴대폰 테마 연동 플랫폼을 개발한 경험을 살려, 휴대폰에 끼우면 화면 속 테마가 바뀌는 케이스를 구상했다. 휴대폰 액세서리와 소프트웨어가 상호 작용하는 일종의 스마트 프로덕트(Smart Product)다.

휴대폰 케이스와 소프트웨어를 연결하기 위해 NFC 기술을 적용했다. “NFC는 일단 편리합니다. 기기에 태깅한 즉시 휴대폰 테마가 바뀌거나 콘텐츠와 연동되죠. NFC는 상용화 20년이 넘은 검증된 기술입니다. 고품질 데이터를 빠른 속도로 다운로드 할 수 있는 통신 환경에 적합한 매개죠. 보안 관점에서도 좋습니다. QR코드나 웹 사이트에서 테마를 다운로드 받을 경우 해킹, 복제 등의 위험이 있는데요. NFC에 일련번호를 적용해 한 번 연동하면 해당 휴대폰에만 종속되는 구조로 설계해 보안 위험을 줄였습니다. NFC 칩은 고온과 습도에도 강해 의류 라벨에도 적용할 수 있어요.”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B2C가 아닌 B2B 비즈니스로 방향성을 잡고, 큰 파급효과를 낼 고객사를 모색했다. 창업 초기부터 삼성전자와 손잡았다. “제조사가 마케팅 툴로 저희 제품을 활용하는 그림을 구상했습니다. MZ세대를 타깃으로 출시한 갤럭시 Z플립용 휴대폰 케이스를 납품해 좋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삼성전자 온오프라인 매장에 저희 제품이 진열됐죠. 삼성전자와의 협업은 회사 성장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국내외 유명 기업 등 굵직한 고객사를 빠르게 유치할 수 있었죠.”

다양한 IP를 적용한 갤럭시 Z플립용 NFC 카드를 들고 포즈를 취한 정 대표. /더비비드

마케팅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과정이다. 인기 캐릭터, 유명인 등 팬층이 두터운 IP를 확보해 대중과의 접점을 확대했다. “팬덤 기반의 사업 모델을 표방하며 초기부터 공격적으로 IP를 확보했습니다. 가장 먼저 디즈니에 접촉했어요.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팬덤을 보유하고 있고, 그만큼 가장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IP가 디즈니라는 판단이었죠. 디즈니는 IP획득이 어렵기로 유명한 기업인데요. 신규 카테고리인 NFC 케이스라는 차별점으로 디즈니와의 계약에 성공했습니다. IP 생태계의 표준인 디즈니와의 협업은 보증수표가 됐습니다. 포켓몬, 산리오, 웹툰, K팝, 스포츠 구단 등 유명 IP를 연이어 확보하는데 성공했죠.”

고객사와 팬덤을 디자인으로 연결하는 전략은 주효했다. 적용 즉시 휴대폰 화면이 바뀌는 SLBS의 제품은 전세계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갤럭시 Z 플립5 스트레이 키즈 에디션의 경우 일본, 동남아,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오픈런 대열을 형성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K팝 IP는 세상에 SLBS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됐어요. 회사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팔로워가 1000%나 증가했죠. 고객사 수요나 IP의 특성에 맞춰 포토카드, 가방, 의류 등 제품군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좋은 디자인은 좋은 스타트업이다

슬래시비슬래시의 고객사와 보유 IP 현황을 설명 중인 정 대표. /더비비드

SLBS는 소유욕을 자극하는 디자인 역량을 마케팅 툴에 영리하게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벤처 생태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2022년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아기 유니콘 기업으로 선정된 데 이어 2024년 예비 유니콘(기업 가치 1000억원 이상)으로 선정됐다. 단기간에 아기 유니콘에서 예비 유니콘이 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최근에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의 스타트업 일본 진출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돼, 일본 TBS이노베이션 파트너스를 비롯한 주요 VC와 오픈 이노베이션 기회를 모색했다.

SLBS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요즘은 글로벌 신발 브랜드 크록스(Crocs)와의 협업에 집중하고 있다. “올해 초 갤럭시 S25 케이스를 출시한데 이어, 지난 8월 애플 스마트폰 아이폰 케이스를 출시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크록스와의 협업은 잠재력이 큰 비즈니스입니다. ‘폰 꾸미기 문화’를 확산하며 많은 소비자를 유치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KBO, KBL 등 국내 스포츠 구단과의 협업도 앞두고 있어요.”

정 대표는 좋은 디자인은 좋은 스타트업과 동일하다고 말했다. “시장이나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업을 한 스타트업처럼 좋은 디자인은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가치를 창출합니다. 저희는 단순히 휴대폰 주변기기나 굿즈를 만드는 회사가 아닙니다. 고객사와 팬덤의 수요에 맞춘 아이템으로 고객사에게는 마케팅 효과를, 최종 소비자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디자인 조직이죠. 디자인은 SLBS의 철학이자 정체성입니다. 재치 있고 핵심을 꿰뚫는 디자인으로 브랜드 가치를 증폭하는 이 일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진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