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성물질 없는 항암 치료, 그 꿈에 거의 다다른 카이스트 교수

2025. 11. 10. 09:38인터뷰

계산 단백질 디자인 전문 바이오텍 테라자인 오병하 대표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창업에 뛰어들며 한국 경제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계산 단백질 설계 전문 바이오텍 테라자인 오병하 대표. /더비비드

2024년 ‘계산 단백질 디자인’(computational protein design) 분야를 개척한 미국 워싱턴대 데이비드 베이커 교수가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계산 단백질 디자인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나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을 이용해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을 디자인하거나 구조를 예측하는 기술을 말한다. 이 기술을 활용하면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단백질을 새롭게 만들어내거나 기존 단백질의 기능을 개선하고 변형할 수 있다.

국내외 바이오 전문가들은 단백질 디자인 기술이 미래 산업과 환경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오병하(64) 테라자인 대표는 40년 넘게 단백질 연구에 집중한 구조생물학 분야 석학이다. 그는 테라자인의 대표로서 신생 항원(neoantigen)을 표적으로 하는 면역항암 항체와 발모 단백질을 개발하는 한편, 카이스트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오 대표를 만나 단백질 연구에 바친 그의 인생을 들었다.

◇단백질 연구에 매료된 이유

1989년 오 대표의 논문이 사이언스지 표지를 장식했다(왼쪽). 1998년 포항공대 재직 시절(오른쪽). /오병하 대표 제공

유난히 동물을 좋아했다. 중학생 시절까지 꿈이 ‘목동’일 정도였다. 1979년 서울대 농과대학 식품공학과에 입학했다.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부터 과학이란 학문에 완전히 빠졌습니다. 과학적 사실이라는 건 천고 불변의 자연법칙으로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바꾸려 해도 바뀌지 않죠.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그 진리를 하나씩 밝혀내는 일이 좋았습니다.”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 대학원에서 생물 물리학 박사 과정을 이어갔다. “당시는 단백질 구조를 알아내는 기술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어요. 핵자기공명(NMR) 기술로 단백질 구조를 알아내는 연구에 참여해, 1989년 저명한 국제 학술지인 사이언스의 표지로 소개되기도 했죠. 이후 UC버클리대학에서는 포스닥(박사후과정)을 하며 X-선 결정학(X-선을 이용해 물질의 원자 배열을 알아내는 기술)이란 방법으로 단백질 구조를 규명하는 연구를 했습니다.”

세포 내 단백질 운반소낭에 대한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2008년 한국과학상을 받았다. /오병하 대표 제공

단백질 연구의 목적은 ‘기능’이다. “제 연구 분야를 ‘구조생물학’이라고 하는데요. 단백질은 생명 현상을 일으키는 일꾼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알려면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가령 네모난 바퀴는 굴러갈 수 없겠지만 동그란 바퀴는 잘 굴러가죠. 보이지 않는 분자 세계에서도 ‘구조(form)가 기능(function)을 좌우한다’는 원리가 그대로 작용합니다.”

1994년 포항공과대학 교수로 부임한 이후에도 단백질 연구는 계속됐다. 세포 내 단백질 이동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 공헌한 것을 인정받아 2008년 한국과학상을 받기도 했다. “세포 안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습니다. 단백질들은 늘 정해진 방에 들어가죠. 눈도 손도 없는 단백질이 어떻게 방을 찾아 들어가는지를 파고들었어요. 단백질이 이동할 때 조그마한 주머니인 ‘운반소낭’에 실려서 운반되는 원리를 밝혀냈죠. 이 연구 결과를 세계적 학술지인 ‘셀(Cell)’에 발표했습니다. 2009년부터는 카이스트로 자리를 옮겨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칭찬은 과학자도 춤추게 한다

2016년 아산과학상 시상식 현장(왼쪽). 오 대표가 수상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오른쪽). /오병하 대표 제공

기초과학 연구에 매진하다 2016년 뜻밖의 상을 받았다. 아산의학상 기초의학 부문의 수상자로 선정됐다. “치료 의학과는 거리가 먼 연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하게도 아산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치료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인류에게 유용한 연구를 하고,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2021년 테라자인을 설립했다. 치료제(Therapeutics)와 디자인(Design)을 합쳐 지은 이름이다. 자연에 없는 인공 단백질, 즉 ‘드 노보(De novo) 단백질’을 디자인하는 데 집중했다. “가장 디자인하기 어렵다는 단백질 중 하나인 ‘신생 항원 표적 면역항암 항체’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암을 일으키는 돌연변이 단백질 조각(신생 항원)이 HLA(인간 백혈구 항원) 단백질과 결합해 세포 표면에 제시되는데요. 이 복합체 (항원)에 정확히 달라붙을 수 있는 항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AI 툴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인실리코), 실험실 시험(인비트로)을 통합해 디자인 성공률을 끌어올렸습니다.”

테라자인 창업 초기 동료들과 남긴 기념 사진. /오병하 대표 제공

기존의 항암 치료는 독성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상용화된 치료는 독성물질을 매단 항체를 몸속에 주입하면, 항체가 암세포를 찾아 결합해 독성물질을 통해 암세포를 죽이는 원리입니다. 항체가 미사일이라면 독성물질이 핵탄두인 셈이죠. 다만 항체가 암세포뿐만 아니라 정상세포와도 결합해 독성이 퍼질 위험이 있습니다.”

테라자인이 개발한 항암 항체는 독성물질이 필요 없다. “우리 몸에 이미 존재하는 전문 킬러인 ‘T세포’를 활용하는 전략입니다. 암세포를 표적으로 하는 항체 단백질 조각을 몸에 주입하면, 지나가던 T세포가 자석처럼 붙어서 암세포를 파괴하는 원리예요. 치료 부작용이 크게 줄어듭니다.”

테라자인이 개발한 항암 항체(TZ-Ab101)이 작용하는 기전을 시각화한 모습. 암세포에 먼저 달라붙은 다음, 암세포를 공격하는 T세포의 결합을 유도하는 원리다. /오병하 대표 제공



신생 항원은 가장 정교하면서도 디자인하기 어려운 표적이다. “암세포 표면의 신생 항원은 매우 적은 수로 존재합니다. 정상 단백질과 비교할 때 불과 1~2개의 아미노산만 다를 때가 많죠. 이를 구별하고 인식하려면 T세포 수용체 수준의 정밀한 디자인이 필요합니다. 테라자인은 계산 단백질 디자인 기술을 이용해 이러한 초정밀 인식 단백질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바이오파마를 꿈꾸는 마라토너

바이오파마가 되기 위한 마라톤을 하고 있다는 오 대표. /더비비드

창업 직후 ‘바이오 혹한기’가 닥쳤다. 투자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 “이 시기를 돌파하기 위해 임상까지 비교적 시간이 짧은 ‘발모 단백질’과 ‘지속성 플랫폼’ 개발도 병행했습니다. 약물의 체내 지속성을 늘려주는 이른바 ‘롱 익스텐디드 라이프(Long Extended Life’)’ 플랫폼이에요. 이를테면 2주에 한번 맞아야 하는 약물도 2개월에 한번 맞을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죠. 2025년 가을, 동물에서의 체내 지속성 평가까지 마쳤습니다.”

2025년 8월 테라자인은 ‘2025 서울바이오허브-셀트리온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 3기 기업으로 선정됐다. 셀트리온은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혁신 바이오·의료 스타트업을 발굴해, 약 1년간 기술·사업화 전문가 자문, 투자자 및 글로벌 바이오 클러스터 네트워킹 기회 제공 등을 통해 유망 스타트업의 기술 고도화를 지원한다. 이후 최종 평가회를 통해 셀트리온과 공동연구 또는 투자 등 실질적 협업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국내 바이오텍으로 출발해 굴지의 바이오파마(Biopharma)로 성장한 셀트리온과 협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내년에는 서울바이오허브에 입주해 다른 바이오텍과도 활발히 교류할 계획이에요.”

한 평생을 단백질 연구에 바친 오 대표. /오병하 대표 제공

최근 가장 큰 성과는 기존 약보다 효과·안전성을 개선한 차세대 신약 후보 물질 2개와, 업계에서 가장 우수한 수준의 기술 플랫폼을 개발해 낸 것이다. “물론 수차례의 임상시험을 더 거쳐야 합니다. 빠른 수익화나 투자 유치를 위해서는 플랫폼에만 집중할 수도 있을 텐데요. 오랜 연구와 임상시험이 필요하더라도 ‘신생 항원 표적의 면역항암 항체’를 놓지 않을 겁니다. 100m 달리기가 아닌 마라톤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어요. 처음 창업할 때의 결심 그대로, 인류의 건강에 기여하면서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는 바이오파마를 목표로 계속 달리겠습니다.”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