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미국도 프랑스도 못한 누구나 집에서 발효 제빵, 간단히 해결한 한국인

더 비비드 2024. 12. 23. 10:46
스마트 발효 솔루션 사워팟 개발기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창업에 뛰어들며 한국 경제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토스터즈의 배기쁨(29) 대표. /더비비드

씨간장은 한식 맛을 책임지는 재료 중 하나다. 서양에도 씨간장 같은 식재료가 있다. 바로 발효종이다. 발효종은 밀가루와 물을 지속적으로 투입해 반죽의 효모, 유산균을 키워주는 발효빵의 토대다. 좋은 발효종을 넣은 빵은 풍미가 뛰어나고 부드럽다. 빵의 나라 프랑스에선 씨간장처럼 수백 년간 유지된 발효종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미국에서 발효빵 만들기 붐이 일었다. 하지만 발효종 키우는 일은 씨간장의 맛을 보존하는 것만큼이나 까다롭다. 토스터즈의 배기쁨(29) 대표는 발효종에 밥을 주기 위해 새벽에 기상하는 일과를 반복하다 지쳤다. 건강한 식탁을 위해 시작한 취미가 건강한 수면을 해치고 있다는 현실을 인식했다. 스마트 발효 솔루션 사워팟(sourpot)을 개발한 계기다. 그를 만나 취미를 업으로 살린 과정을 들었다.

◇국회 보좌진과 IT 서비스 기획자의 공통점

배 대표는 국회에서 법안을 만드는 것과 IT 서비스 기획자의 일에서 공통점을 찾앗다. /더비비드

배 대표는 동국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같은 과 동기나 선후배들이 국회에서 경력을 쌓을 때 그는 IT 서비스 기획자로 일했다. 삼성, LG 등 대기업에서 사용하는 자동화 툴 개발사에서 3년 근무하다가 피사체 추적 촬영 기기 개발사로 이직했다. 서비스 B2C와 B2B 시장에서 두루 경험을 쌓다가 하드웨어 개발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원래는 IT 문외한이었다. 대학생 때 우연히 참여한 프로젝트로 IT를 알게 됐다. 정신 차려보니 여론조사 기관의 빅데이터 센터에서 첫 인턴 생활을 했다. “문과이면서 이과인 수상한 시기를 보내다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했어요. 전공에 몰입할 땐 굵직한 사회 문제에 초점 맞췄습니다. IT 업계에 몸 담아보니 세상에 고쳐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더군요. 작은 불편함만 개선해도 행복할 수 있었어요. 국회에서 법안을 만드는 것과 서비스 기획으로 고충을 해결해주는 게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어요. 게다가 IT 서비스는 소비자의 효용을 즉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으니 재미도 있었습니다.”

◇반죽 발효 기다리다 지쳐 미니 온장고 개조, 하루만에 5대 완판

배 대표는 사워도우 빵 만들기에 푹 빠졌다. (왼쪽부터) 배 기쁨 대표, 배 대표가 만든 빵들. /더비비드, 배기쁨 대표 제공

그에게는 사워도우 빵 만들기라는 독특한 취미 생활이 있었다. 사워도우는 이스트 없이 발효해서 시큼한 맛이 나는 빵의 반죽이다. 바게트처럼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고 쫄깃한 빵이 대표적인 사워도우 빵이다. 배 대표의 주종목은 프랑스 전통 빵 캄파뉴였다.

하나에 꽂히면 끝을 보고 마는 성정을 취미 생활에서 발현했다. “애써 만든 빵을 물었더니 이가 깨지는 소리가 났어요. 영문을 몰라 발을 동동 굴렸죠. 당시 한국에서 사워도우가 유명하지 않아서 베이킹 학원을 찾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집념을 발휘해 국내 사워도우 정착에 이바지한 분을 찾았어요. 무작정 찾아가 제빵 수업에 등록했죠. 동료 수강생들은 인기 식당의 메인 셰프, 유명 빵집의 제빵사 등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취미로 온 사람은 저뿐이었죠. 빵집을 차릴 마음도 없었지만 어떻게 해야 발효가 잘 되는지 그저 궁금했어요. 평일엔 일, 주말에는 학원에서 시간을 쏟으며 2~3년을 보냈습니다.”

타사의 온장고에 시나리오 기능만 추가한 최초의 시제품. /토스터즈

사랑하는 취미도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사워도우를 발효하는 데만 30시간이 걸립니다. 직장인이 소화하기엔 힘에 부치는 작업이죠. 보통 주말에 취미 생활을 하지만 발효 시간 때문에 평일에도 시간을 할애해야 했습니다. 하루는 새벽 2시에 빵을 굽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이 시간에 빵이 먹고 싶긴 할까,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현실적인 생각이 닥쳤죠. 처음엔 재미있어서 홀린 듯 빠져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발효가 끝나길 기다리는 시간이 고통스러웠어요. 건강에 무리가 갈 정도로 편하게 잠들 수 없는 이 상황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죠.”

반죽의 컨디션을 좌우하는 건 온도와 시간이다. 사워도우 메이커들은 이전까지 발효종을 냉장고에 뒀다가 상온에 두는 작업을 직접 반복하며 발효종의 컨디션을 관리했다. 이 절차만 자동화해도 취미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비로 프리랜서 엔지니어를 고용해 미니 온장고를 개조했어요. 시간과 온도를 조절하는 시나리오만 추가했을 뿐인데 삶이 편해졌어요. 아침 9시에 빵을 굽기 위해 새벽 5시에 발효종에 밥 주는 일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죠.”

사워팟을 설명 중인 배 대표. /더비비드

개조한 기기를 베이킹 스쿨 동료들에게 자랑했다. ‘나도 그 기계를 만들어 달라’는 반응이 쇄도했다. 하루만에 5대가 팔렸다. ”발효종 키우는 일이 모두에게 큰 스트레스였음을 깨달았습니다. 나만 게으른 줄 알았는데, 누구나 힘들어하는 일이었던 거예요. 비슷한 기능을 하는 발효기가 있었지만 업장용이라 단위도 크고 가격이 비싸요. 소비 전력도 바꿔야 하고요. 베이킹 끝판왕에 도달한 분들은 그런 수고로움을 감수해서라도 그 기기를 들입니다. 그만큼 가정용 발효기가 절실했던 거죠.”

취미생활을 통해 얼떨결에 창업의 기로에 섰다. 이 길이 맞는 걸까. 몇 가지 단서가 확신을 줬다. “피사체 추적 촬영 기기 회사에 있을 때 미국 니치 시장의 위력에 놀란 적이 있어요. 회사 매출의 95%가 해외에서 발생했는데요. 특히 승마인들 사이에서 호평을 얻었습니다. 한국에서 눈대중으로 판단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스케일이었죠. 마침 코로나 팬데믹 이후 미국에서 사워도우 만들기 붐이 일었어요. 집에서 할머니가 밀가루와 물로만 만든 건강빵이라는 인식이 퍼진 결과였죠. 뉴욕 타임즈에서도 다룰 정도로 인기였어요. 전미 사워도우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인구는 70만명이고, 전체 사워도우 시장 규모는 1000만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뛰어들 가치가 있는 시장이라고 판단했어요.”

◇발효종이 ‘반려종’이라 불리는 이유

사워팟을 개발하는 모습. /토스터즈

가정용 발효기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미니 냉장고처럼 투박한 디자인을 구상했다. 오로지 ‘기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판이었다. 시장조사를 해보니 타깃 소비자들은 배 대표와 정반대의 관점을 고수하고 있었다. 사워도우 메이커들이 진정 원하는 건 완전무결한 기능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취미 생활에 즐거움을 주는 기기였다. 발효종을 다루는 이들의 마음은 반려동물에 대한 마음과 비슷하다. 먹이고, 재워줘야 한다며 ‘반려종’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이들에게 발효종은 소중하고, 돋보여야 하며, 내 눈으로 수시로 확인 가능해야 했다.

사워팟 최종 디자인. 발효가 완료되면 발효통 상단에 스포트라이트를 내려준다. /토스터즈

이 기준을 토대로 발효기의 디자인부터 뜯어고쳤다. “처음에는 싱크대나 집 어느 구석에 배치하는 걸 전제하고 개발했는데요. 커피 머신 옆이나 거실에 둘만한 디자인으로 방향성을 틀었습니다. 우선 전면을 불투명한 문 대신 투명한 유리로 바꿨습니다. 예쁜데다 발효종의 상태를 쉽게 확인할 수 있어 유용하기까지 하죠. 발효가 끝나면 발효종이 담긴 용기에 스포트라이트가 내려옵니다. 애써 만든 발효종을 자랑할 무대를 마련해준 거죠. 취미 시장에선 이런 요소가 필요합니다. 핵심 기능은 아니지만 정서적인 충족감을 주는 요소죠.”

사워팟 연동 앱으로 구동할 수 있는 기능들. 발효까지 남은 시간, 레시피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토스터즈

사워팟은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조작할 수 있다. 앱 개발 시 이용자의 행동양상을 최대한 반영했다. “단순 발효기가 아니라 취미생활을 도와주는 도구라는 관점으로 접근했습니다. 하드웨어를 앱으로 구동하는 것에 그치는 건 의미가 없었어요. 이용자의 일상에 깊이 스며야 했죠. 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건 발효종에 밥을 주는 타이밍이나 온도 같은 정보입니다. 그래서 스케줄링 기능을 넣었습니다. 발효종을 넣어두고, 빵을 구울 수 있는 시간을 입력하면 그 시점에 맞춰서 온도를 조절해서 반죽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줍니다. 물이나 밀가루를 추가해야 하는 시간도 알람으로 알려줍니다. 게다가 예상 발효 완료 시간을 보여줘 일정 짤 때 유용합니다.”

◇사워도우빵 만들기, 더 이상 신포도가 아닙니다

정주영창업경진대회에서 도전트랙 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토스터즈

지난 7월 토스터즈 법인을 설립하고 시제품 제작을 완료했다. 아직 정식 출시를 하지도 않았는데 스타트업 생태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올해 신용보증기금의 스타트업 네스트,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의 ICT 혁신 디바이스 서비스 바우처 지원사업 등 다수의 시원사업에 선정됐다. 대회도 휩쓸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ICT 스마트 디바이스, 한국여성벤처협회의 여성벤처 성장 챌린지 등에서 상을 받았다. 지난 11월에는 국내 최대 스타트업 경진대회인 정주영창업경진대회에서 도전트랙 부문 장려상을 거머쥐었다.

내년 1분기 중 미국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시작으로 사워팟을 출시할 계획이다. 사워팟의 용량은 2L로 빵 200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이용법은 간단하다. 발효통에 밀가루와 물, 기호에 따라 발효용 과일을 넣는다. 그 이후부터는 사워팟이 발효 진행 상태와 필요한 액션을 알려준다. 빵의 종류별 레시피도 제공한다. 사워팟 하나로 캄파뉴, 바게트, 시나몬롤 같은 빵은 물론 식혜나 막걸리 같은 발효 음료도 만들 수 있다. 토스터즈 구성원들이 가장 즐겨 만드는 빵은 피자다.

배 대표는 사워팟을 시작으로 발효 생태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말했다. /더비비드

사워팟은 초보 베이커에게는 도전할 용기를, 숙련된 베이커에게는 편안한 잠을 선물한다. “운동처럼 내 시간에 맞춰 취미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효용 같아요. 내 일정에 빵이 찾아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워도우 진입 장벽을 낮추는 역할도 할 겁니다. 제빵을 배우면서 들었던 가장 무서운 말이 “5년쯤 지나면 금방 해결된다”는 선배들의 조언이었어요. 취미생활인데 시간이 해결해줄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건 너무 야속하지 않나요. 이런 인식 때문에 이 시장을 ‘신포도’로 단정해버리는 분들이 많아요. 진입장벽을 허물면 누구나 저렴한 가격으로 재미있게 건강한 빵을 만들어 먹을 수 있어요.”

사워팟이 발효빵의 매력을 알리는 매개로 활용할 구상이다. “아이팟 이용자들이 아이튠즈를 사용해야 하듯, 사워팟을 핵심 인프라로 발효 생태계를 꾸리고 싶어요. 발효 시나리오와 레시피 콘텐츠를 제공하고, 믹스 판매 비즈니스에도 진출할 구상입니다. 사워팟을 더 똑똑하게 만들어줄 도구로는 탐침 온도계를 낙점했어요. 온도계로 습득한 데이터를 학습시키면 레시피 콘텐츠를 더 고도화할 수 있겠죠. 이 구상대로라면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사워도우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발효는 독특하게 건강을 챙기는 권리입니다. 누구나 건강한 삶을 영위할 권리를 누렸으면 좋겠어요.”

/진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