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고용상황 속
적성과 기술을 찾은 2030 청년들
대학 졸업 후 일도, 구직활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올해 상반기 기준 400만명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를 기록했습니다. 원하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건데요. 어느 때보다 힘든 고용상황 속에서도 희망은 있습니다. 잠시 방황했지만 자신의 적성과 기술을 찾은 청년을 통해 희망을 전하는 '2030 취업 분투기'를 연재합니다.
심각한 취업난으로 대학을 졸업하거나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진로를 바꾸기 위해 대학에 재입학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른바 ‘유턴 입학생’이다.
한국폴리텍대학(폴리텍대)은 고용노동부 산하 직업 교육 기관이다. 연령 제한 없이 한 학기 130만원 가량의 등록금을 내고 2년 공부하면 학위를 받을 수 있다.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폴리텍대 유턴 입학생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19년 15%였던 유턴 입학자는 올해 23.3%를 기록했다.
어린이집 교사에서 전기 설계사가 된 정유진(26)씨도 진로 변경을 위해 폴리텍대에서 공부했다. 아이들이 좋아 어린이집 교사가 됐지만, 열악한 근무 환경 때문에 번아웃을 겪다가 결국 3년째 되는 해 교사를 그만뒀다. 이후 폴리텍대 성남캠퍼스 전기과에서 공부하고 플랜트(공장) 설계 기업 이엔에쓰플랜트엔지니어링에서 전기 설계사로 두 번째 커리어를 시작했다. 정유진씨의 ‘전기장이’ 도전기를 들었다.
◇ 진로 고민으로 방황하다 우연히 마주친 ‘전기버스’
중학생 때부터 방학이면 아이들을 돌봤다. “어린이집 교사였던 이모를 따라 어린이집에 갈 일이 많았어요. 우연히 한 교사분이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아이들에게 숫자를 가르쳐주는 모습을 봤어요. 그 순간 어린이집 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죠. 놀이에 교육을 접목한 일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2016년 신구대 유아교육과에 진학했다. “그림을 잘 그리거나 피아노를 잘 치지는 않았지만, 영유아에게 놀이로 교육하는 건 적성에 맞았어요.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자신 있었죠.”
꿈꾸던 어린이집 교사가 됐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점심 시간에도 아이들을 돌보느라 바빠 밥을 거르기 일쑤였어요. 아이들 안전을 신경 써야 하니 매사 긴장 상태였고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결국 번아웃이 왔어요.”
3년간 앞만 보고 달리다 어린이집을 그만뒀다. 처음 자신을 돌아봤다. "처음에는 다시 교사로 돌아갈 생각이었죠. 퇴사 후 무작정 여행을 다녔어요. 별을 보러 시골로 떠나거나 캠핑을 하기도 했죠.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나니 제가 어린이집에만 목맸던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휴학 한번 하지 않고 졸업해 바로 취업했거든요. 아직 젊으니 다른 직종에 도전해도 되지 않을까, 용기가 생겼습니다.”
진로를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히 도로에 ‘전기 버스’가 지나가는 걸 봤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어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순간 ‘전기 버스’라고 쓰여 있는 버스가 지나가는 걸 봤어요. 갑자기 ‘전기’라는 단어에 꽂혔죠. 전기는 안 쓰이는 데가 없잖아요. 내가 일할 곳 한 군데는 있지 않을까 싶었죠.”
전기를 공부하고 싶다는 말에 부모님과 주변 친구들은 반대부터 했다. “가족과 친구들이 ‘전기 일은 여자가 하기 힘들다’며 엄청나게 말렸어요. 그보단 제가 네일아트를 좋아하니, 네일샵을 차리라고 하셨죠. 같이 일했던 어린이집 교사들도 왜 이제 와서 진로를 바꾸려고 하는지 의아해했습니다. 그래도 확고한 제 태도를 보고 진심인 걸 알았나 봅니다. 마지막에는 뭘 해도 잘할 거라며 주변에서 응원을 건넸습니다.”
◇ 개강 첫날 홍일점 ‘전기 초보’, 학과 수석으로 졸업까지
2022년 폴리텍대 성남 캠퍼스 전기과에 입학했다. “부모님께 전기과에 진학하겠다고 말씀드린 지 며칠 안 됐을 때였어요. 어머니께 전화가 왔어요.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폴리텍대 홍보 포스터를 보셨다고요. 딱 이거다 싶었어요. 등록금도 저렴하고 수능을 보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더군요. 그때가 밤 9시였는데 마감 3시간 전에 원서를 접수했어요.”
시간이 촉박했지만, 최선을 다해 입학시험을 치렀다. “서류 합격 후 면접을 준비하며 전기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서점에 가서 ‘찐 초보 걸음마 전기’라는 책을 사서 읽었어요. 처음에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름 공부해 보겠다고 하루 종일 책을 붙잡고 끙끙댔어요. 암기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책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공책에 옮겨적으며 공부했어요. 노력이 통한 건지 면접에 합격해 폴리텍대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개강 첫날, 강의실에 있는 동기 36명 중 여학생은 정 씨 혼자였다. “강의실에 저 혼자 여자였어요. 같은 반 여학생이 한 명 더 있긴 했지만,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돼서 학교에 못 나왔었거든요. 10kg이나 되는 무거운 전선을 들어야 하는 수업에서 혼자 여자로 버틸 수 있을까 싶었죠.”
무거운 장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매 수업이 도전 과제였다. “전기 회로를 연결하는 시퀀스 과목을 들었을 때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옆자리 동기에게 도움받아 겨우 끝냈어요. 고등학교나 직장에서 전기를 접했던 친구들을 따라가지 못해 ‘잘못 입학한 건 아닌가’ 고민했어요. 그럴 때마다 응원해 줬던 주변 사람의 말을 떠올리며 버텼습니다. 한 학기 등록금 낸 만큼만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이미 낸 등록금이 아까워 눈 딱 감고 한 학기만 다녀보기로 했다. “뒤처지는 게 두려워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등록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학기만 다니고 정해도 늦지 않겠다 싶었죠. 수업이 오후 5시쯤 끝나면 야간반으로 이동해 바로 복습했어요. 밤 10시까지 매일 공부해 건물 소등하는 경비 아저씨와 친해질 정도였어요. 적당히 공부하면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시험 기간에는 새벽까지 공부하다 저도 모르게 잠에 들어 꿈속에서 문제를 푼 적도 있어요. 잠에서 깼는데 제가 공책에 문제 풀이를 적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 체계적인 학과 수업으로 전기 공부에 푹 빠지다
이론과 실습이 적절히 섞인 커리큘럼 덕분에 전기 공부에 금방 재미를 붙였다. 학과 교수진도 정씨의 열정을 알아봤다. “이승재 교수님이 전기 이론을 습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어려운 과제를 받은 날에는 새벽 1시까지 메신저로 질문했거든요. 이 교수님도 제가 답을 알아낼지 궁금하실 정도였대요. 황정호 교수님도 독려를 아끼지 않으셨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전류를 설명해 주기 위해 전자 접촉기 내부를 분해해 보여주신 적도 있죠. 두 분 다 전기 공부를 포기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전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입학한 정 씨는 집념으로 1학년 2학기 학과 수석이 됐다. 대한전기학회 하계 학술대회 금상도 받았다. “학술대회를 위해 동기들과 겨울 방학을 반납하고 논문을 썼어요. 농어촌 인삼밭 절도 사건을 접하고 사람이 없어도 감시할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었습니다. 반년 동안 AI(인공지능) 프로그램도 배울 수 있었어요.”
졸업 프로젝트에 참여해 1년간 실습수업도 들었다. “1년 동안 졸업 과제 ‘융합 프로젝트’에 몰두한 게 기억에 남아요. 20명 가까이 되는 동기들과 함께 진행했어요. 이론을 주제로 토론하고, 전기 설계를 구현해 볼 수 있었어요. 전기 실습실에서 전기 장비 같은 실습 도구를 자유롭게 사용하며 실습 현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전기기능사, 전기산업기사, 전기공사산업기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어린이집 교사는 유아교육과 출결과 성적으로 졸업할 때 자격증을 취득해요. 그래서 국가자격증이 따로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전기 자격증은 학과 과정 외에도 따로 공부해야 딸 수 있더라고요. 2년간의 학교생활을 자격증 취득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임해서 길지 않은 시간에 자격증을 땄어요.”
◇ 늦었다고 생각해도 뭐 어때, 늦은 김에 도전하면 되는데
졸업을 앞둔 2학년, 전기 설계사로 직무를 정했다. “처음에는 실습수업을 제일 재미있게 들었던 경험이 있어서 현장에서 시공하고 싶었어요. 여자라서 체력적으로 힘들 것 같았지만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쉽지 않더라고요. 면접을 볼 기회조차 없었어요. 그러다 학교 선배와 교수님에게 시공직보다 설계직을 먼저 경험하는 게 경력에 도움이 된다는 조언을 들었어요.”
교수 추천으로 플랜트 설계 기업 이엔에쓰플랜트엔지니어링에 지원했다. “먼저 이 기업에 취업한 선배가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입사를 결심했어요. 전기 설계 직원 수만 150명 이상이라는걸 듣고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학과 성적이 좋아 교수님이 추천서를 써줬어요. 면접을 준비할 때 선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예상 질문을 외우기보다는 예의 바른 태도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올해 1월 이엔에쓰플랜트엔지니어링의 전기 설계사가 됐다. “플랜트 설계 회사는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이 아닌 공장 같은 곳의 전기 배선을 설계해요. 건물이 하중을 견디려면 대전류를 많이 사용해요. 기계는 물론 공조, 소방 등 다양한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큰 규모에 겁먹었지만, 선임분들이 도와줘서 잘 적응할 수 있었어요.”
‘전기장이’가 되는 게 앞으로의 목표다. “전기기술사자격을 따고 싶어요. 공부하는 데 기본 5년 이상 걸리고 내용도 어려워 ‘전기 자격증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자격증입니다. 이 자격증을 따면 전기 설비의 계획, 설계, 시공 및 감리까지 수행할 수 있는 업무의 범위가 넓어지거든요. 폴리텍대 전기과에는 전기기술사자격을 취득한 교수가 많아요. 이들처럼 전기 공부를 더 해서 진정한 ‘전기장이’가 되는 게 제 꿈입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늦더라도 도전하라고 강조했다. “저도 20대 중반에 진로를 바꾸며 조바심이 났던 적이 있어요. 그때 같은 반이었던 한 50대 동기를 보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저희 부모님 나이가 비슷한데도 매일 아침 7시에 등교해 도서관에서 늘 공부하더라고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존경스러웠어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 진짜 늦었으면 어때요. 이왕 늦은 김에 도전해 보면 되죠. 어린이집 교사였던 저도 전기 설계사가 됐으니, 세상에 못 할 일은 없어요.”
/진은혜 에디터, 이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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