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페이지 행동 데이터 기반 마케팅 솔루션 개발한 피카디 정원모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경희대 한의학과 학생에겐 보통 ‘한의사’란 미래가 정해져 있다. 졸업을 1년 앞둔 본과 3학년에 딴 길로 샌 한의학도가 있다. 피카디 정원모 대표(36)는 당시 처음 등장한 스마트폰인 아이폰 3GS을 계기로 코딩에 마음을 빼앗겼다.
8개월간 앱 개발을 독학해 한의학 앱을 출시하는가 하면, 육아 플랫폼 ‘끼리’, 한글 따라쓰기 교육 앱 ‘소학당’을 연달아 개발했다. 그러는 사이 고려대 뇌공학 석사, 경희대 기초의과학 박사 과정까지 수료했다. 정 대표가 요즘 심취한 곳은 온라인 쇼핑몰이다. 소비자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상세페이지에 남은 소비자의 발자국을 분석한다. 정 대표를 만나 상세페이지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었다.
◇한의학도가 개발한 앱
경희대 한의학과에 입학했다. 부모님의 뜻에 따른 결정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꿈이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도 대학에 진학한 후엔 또 열심히 학교에 다녔습니다. ‘좋은 한의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기도 했죠. 스마트폰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본과 4학년이던 2009년 여름, 최초의 스마트폰인 아이폰 3GS가 출시됐다. “원래 전자기기를 좋아하던 사람도 아니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어요. 원하는 정보를 언제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충격적으로 다가왔죠. 코딩이나 개발에 있어선 일자무식이면서 앱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의학책을 옆에 끼고 앱 개발 공부에 돌입했다. 8개월간 iOS 관련 C언어를 독학해 한의학 앱 ‘한의틔움’을 개발했다. “사전식으로 한의학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앱이었습니다. 혈자리·침구학·한약재 등 카테고리별로 찾아볼 수 있도록 했죠.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웠어요. 출시 1년 만에 다운로드 수가 20만건을 돌파했고, ‘앱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메일을 받기도 했죠.”
꼭 한의사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졌다. “한 갈래처럼 보였던 길이 확 넓어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코딩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돈을 벌기보단 더 공부하고 싶단 생각이 앞섰죠. 고려대 뇌공학과 석사과정을 밟기로 했습니다. 연구 주제와는 별개로 주된 관심사는 머신러닝(기계 학습)이었어요. 이후 경희대 기초의과학 박사과정을 이어가면서 사람의 뇌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되고 바라본 나의 아버지
그러는 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 2020년 10월부터는 육아에 전념해야만 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어린이집이 문을 닫았고, 하루 종일 4살 난 딸아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야 했죠. 그 무렵 소아과에서 근무했던 한의사 선배가 툭 던진 한마디에 다시금 열정이 샘솟았습니다. 영유아 검진·처방 기록을 보호자가 쉽게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죠.”
당연한 말이지만 현실은 당연하지 않았다. “아이의 의료기록을 보려면 공인인증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야만 했습니다. 아이의 검진, 접종, 처방 기록을 쉽게 열어볼 수 있는 앱을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안드로이드와 iOS 버전을 동시에 제작할 수 있는 플러터를 활용해 1년 만에 육아 의료 정보 플랫폼 ‘끼리’를 출시했습니다.”
끼리에서 아이의 개월 수에 따른 성장 현황, 처방약 분석, 알레르기 질환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출시 1년 만에 1만명의 사용자가 모였다. “2021년 가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손을 놓아버렸습니다. 앱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광고를 받거나, 투자를 받아 서비스 규모를 키우는 등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참 허무하네요.”
남은 건 개발 기술뿐이었다. “여러 스타트업에서 임시직 CTO(최고 기술 관리자)로 근무하면서 컨설팅을 해주는 일을 했어요. 오류를 바로잡고 개발 방향을 설정해 줬죠. 동시에 개발을 간편하게 해주는 개발 생산성 도구를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정식 서비스로 판매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혼자 방황하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동료와 함께 만들어내는 에너지
앤틀러코리아의 배치 프로그램은 새로운 동기 부여를 하기에 충분했다. “창업을 꿈꾸는 이들이 모여 팀원을 찾고 함께 아이템을 선정해 투자유치까지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인데요. 전 2기가 시작된 지 7~8주 만에 합류해 투자심의 발표까지 단 2주가 남은 상황이었어요. 이번에도 안 되면 창업엔 발도 들이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아이템을 찾는 데 온 힘을 쏟았죠.”
팀원들과 각자의 전공 분야를 위주로 아이템을 탐색했다. “마케팅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온 팀원이 있었고, 전 인공지능(AI) 분야에 자신이 있었죠. 그렇게 떠올린 아이디어가 생성AI를 활용해 광고 배너나 SNS 광고 콘텐츠를 자동으로 생성해 주는 프로그램이었어요. 하지만 실제로 개발해 운영해 보니 ‘광고 에이전시’의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더군요.”
광고 콘텐츠 그다음을 살펴봤다. 소비자가 구매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는 콘텐츠는 ‘상세페이지’였다. “광고를 보자마자 구매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잠재의식에 들어와 있다가 그 제품이 필요하다 느낄 때 검색해서 구매하죠. 광고의 효과를 수치화하기 힘든 이유입니다. 반면 상세페이지는 구매로 직결되는 콘텐츠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세페이지를 분석하거나 제작을 지원하는 도구는 없었죠. 바로 그걸 만들기로 했습니다.”
상세페이지 분석을 크게 두 단계로 나눴다. 콘텐츠 분석과 소비자의 행동 분석이다. “상세페이지는 보통 글과 사진이 뒤섞인 이미지 파일이에요. 세로로 길게 이어 붙인 형태라 분석이 쉽지 않죠. OCR(광학문자인식)과 컴퓨터비전(컴퓨터에 시각 데이터 처리 능력을 부여하는 기술)을 이용해 글과 사진을 분리했습니다.”
소비자의 행동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법은 더 간단하다. “판매자 홈페이지에 스크립트 한 줄만 심으면 됩니다. 소비자의 스크롤 위치와 가속도 정보를 수집해 정보로 활용할 수 있죠. 이를테면 오래 머물렀던 곳에 어떤 콘텐츠가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그 콘텐츠를 중심으로 상세페이지를 구성하면 더 효과적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훔칠 수 있을 테니까요.”
구글 애널러틱스(GA4)나 메타 픽셀(Pixel)과의 차이점은 뚜렷하다. “GA4, 픽셀로는 특정 상품이 왜 고객에게 인기가 많은지, 왜 다른 상품은 안 팔리는지를 분석하기 어렵습니다. 두 도구에서는 소비자가 광고·상세페이지·장바구니·결제 등의 단계에서 어디까지 왔는지를 분석하는 데 그칩니다. 어떤 문구를 유심히 봤는지, 어떤 이미지를 보다가 결제 버튼을 눌렀는지는 분석하지 못하죠”
◇소비자의 마음 엿보기
2023년 정 대표는 앤틀러코리아의 배치 프로그램에서 만난 옥진석 CPO와 김일식 CTO와 함께 피카디(fika.d)를 설립했다. 서비스 정식 출시를 앞두고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했다. “반려동물을 키운 경험이 있는 20~30대를 대상으로 상세페이지 행동 패턴을 분석해 생성한 개인화 리타게팅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유입률은 35.5%, 구매 전환율은 16.8% 상승했어요.”
지난 10월 피카디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이 주관하는 창업경진대회(디데이) 본선 무대에 올랐다. 현재 피카디의 유료 고객사는 반려동물 용품 브랜드 페스룸, 이너뷰티 브랜드 오니스트 등 4곳이다. “피카디는 아직 MVP(최소기능모델) 단계예요. 고객사에는 PDF 형태로 리포트를 전달하고 있죠. 상반기 중으로 대시보드를 완성해 정식 출시할 계획입니다. 알쏭달쏭했던 소비자의 마음, 피카디에서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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