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알약 재분류 로봇 개발한 메디노드 황선일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수년 전부터 의료 관광 산업이 주목받고 있다. 한국의 선진 의료기술을 기대하며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 업계에서는 ‘K-호스피탈’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의료기술이 급성장하는 동안에도 의료 장비 산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대부분 일본·독일·미국 등에 의존하고 있다.
메디노드 황선일 대표(35)의 꿈은 의료기기 국산화율을 높이는 것이다. 그 시작은 약에서 출발했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며 대형병원 약사들의 불편함을 목격했다. 돼지저금통에서 쏟아진 동전을 일일이 분류하듯 하루에도 수천 알에 달하는 알약을 재분류해야 하는 일 때문이다. 10·50·100·500원 4종류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약 종류는 수백 가지가 넘는다. 황 대표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이를 자동화하는 장비를 개발했다. 황 대표를 만나 알약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었다.
◇내향형 신입사원이 영업할 때
2016년 인하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이듬해 4월 한미약품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한미약품 자회사인 온라인팜의 국내병원장비기술영업부로 발령을 받아 ATC 장비를 영업하는 일을 맡았다. ATC(Automatic Tablet Counting and dispensing)는 처방전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한 포씩 포장해 주는 장비다.
처음 영업하러 간 곳은 신촌 세브란스 병원이었다. “제약 담당 국장실 문 앞에 서서 노크도 못 하고 15분간 땀만 삐질삐질 흘렸어요. 내가 아는 가장 큰 병원에서 나보다 직급이 몇 단계나 높은 사람을 만나서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막막했죠. 물론 그날 바로 영업 성과를 따내진 못했지만 그때 흘린 땀이 절 성장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정말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지금 MBTI 검사를 하면 E(외향형)가 나오거든요.”
영업을 위해 약제실에 들어갈 때마다 꼭 보는 장면이 있었다. “산더미처럼 알약을 쌓아놓고 약사 5~6명이 모여 분류하고 있었습니다. 환자와 약사의 편의를 위해 처방전이 나올 때마다 한 포씩 약을 미리 소포장해 두는데요. 그 순간 약이 뒤섞여요. 환자가 약을 찾아가지 않거나 처방이 달라지면 그 약을 일일이 다시 분류해야 했습니다. 2000병상 규모 대형 병원 기준으로 연 50억원어치에 달하는 양이라 그냥 버릴 수도 없었죠. 약사들은 입버릇처럼 약을 재분류해 주는 장비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약사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 테슬라의 영업 방식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자동차 딜러가 사라지고 모든 계약이 온라인으로 이뤄졌죠. 지금 내 자리가 과연 10년, 20년 뒤에도 있을까 자문해 봤을 때 답은 ‘NO’였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더 이상 내 청춘을 바치고 싶지 않았죠. 1년간 고민하다 2020년 1월 사직서를 냈습니다.”
◇재취업하려다 창업의 길로
퇴사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컴퓨터 학원 등록이었다. “사람의 일을 기계나 로봇이 대신하게 되는 가장 큰 배경은 ‘인공지능’의 발달이라고 생각했어요. 6개월짜리 국비 지원 인공지능 전문가 과정을 등록했습니다. 수업을 다 듣고 나면 취업까지 연결해 주는 조건이었죠. 학원에 다니면서 약을 재분류하던 약사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습니다. 지금 배우는 인공지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머릿속 가설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약 재분류기 프로토타입 제작을 위해 4명의 팀원을 모았다. “먼저 개별 약의 특징을 잡아내야 했습니다. 색상, 크기 같은 단순한 정보부터 캡슐형인지, 정(tablet)형인지, 어떤 각인이 새겨져 있는지까지 확인해야 하죠. 딥러닝을 활용하면 그 과정을 자동화할 수 있습니다. 360도 각도에서 알약을 촬영하고 그 이미지를 기반으로 개별 약의 특징점을 자동으로 추출하도록 했죠.”
3개월 매달린 끝에 20가지 종류의 알약을 분류하는 데 성공했다. “팀원들과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 프로토타입을 바탕으로 1년만 더 개발하면 상용화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죠. 퇴직금까지 탈탈 털어 초기 자본금 3억원으로 창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습니다. 2021년 메디노드를 설립했어요.”
상용화까지 1년은 턱도 없었다. “소프트웨어와는 별개로 하드웨어 장비를 만드는 데에도 손이 많이 가더군요. 사람이 먹는 약을 다루는 장비라 일반 플라스틱이나 철을 쓸 수 없고, 내화학성이 확인된 소재만 사용해야 했습니다. 금속 소재가 필요한 부분엔 녹슬지 않는 서스(SUS), 알루미늄(AL)을 쓰고, 컨베이어 벨트는 고무가 아닌 PLA(옥수수 전분 등으로 만든 친환경 소재)를 활용했어요. 약 3000개의 부품이 들어가는데 그 중 직접 설계·가공한 부품이 400~500개에 달합니다.”
수십번의 재설계 끝에 시제품을 만들었다. 알약 220종을 재분류하는 장비였다. 2022년 말부터 L병원과 A병원에서 차례로 한 달간 상용 테스트를 했다. “약사들은 숙원사업이었다며 테스트 자체를 반기는 분위기였어요. 기존에 사용하던 일본산 장비보다 속도는 6배 빠르고, 동시에 취급하는 약 종류도 4배 이상 많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시제품도 충분히 좋으니 그대로 놓고 가 달라고 할 만큼요.”
부족한 점은 곧바로 보완하고 개선했다. “당시 시제품은 약이 장비의 제일 하단으로 떨어지는 방식이었는데요. 약을 꺼낼 때마다 허리를 숙여야 하는 단점이 있었죠. 세로형 디자인에서 가로형 디자인으로 전면 수정했습니다. 분류 정확도도 99.5%에서 99.9%로 향상시켰어요. 0.5%의 오차가 어찌나 제 마음을 무겁게 했던지요. 약이 잘못 분류되면 정말 큰 일이니까요. 이젠 자신 있어요. 편의상 99.9%라고 했지만 99.9999% 수준입니다.”
◇똑똑똑, 저 다시 왔습니다
2021년에 출원했던 특허가 2023년 등록됐다. 알약 촬영 자동화 방법과 알약 재분류기 전체 시스템에 대한 내용으로 2건이다. 은행권청년창업재단 디캠프가 개최한 ‘2023 디캠프 올스타전’에서는 1부 대상인 디캠프상을 받았다. 호재는 이어지고 있다. 2024년에 상용화 버전의 알약 분류기 데모 테스트가 확정된 병원이 7곳이다. “먼저 테스트했던 병원의 약사가 다른 병원에 ‘일본 장비보다 더 좋더라’고 입소문을 내 주신 덕분입니다.”
가장 최신 버전의 알약 재분류기는 약 종류가 220종에서 180종으로 줄었다. “대신 이마트나 홈플러스의 매대에 붙어있는 ESL(전자식 매대 표시기)을 약통 하나하나에 부착했어요. 액정만 보면 어떤 약이 몇 정씩 들어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했죠.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일본 장비가 약 1억5000만원인데요. 그보다 더 저렴하면서 성능은 더 끌어올려 2025년부터 본격적으로 판매·영업할 계획입니다. 예전처럼 국장실 문을 두드릴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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