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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가습기는 우리가 삼성" 매년 200억원 대박 한국 기업

완벽 세척 가습기 개발한 미로 서동진 대표

많은 아이디어가 발상의 전환이나 우연에서 시작되지만, 상품으로 시장에 나오려면 부단한 노력과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실행은 엄두내기 어려운데요. 나만의 아이디어로 창업을 꿈꾸는 여러분에게 견본이 될 ‘창업 노트 훔쳐보기’를 연재합니다.

완벽 세척 가습기를 개발한 서동진 대표(왼쪽)와 오용주 대표(오른쪽). /더비비드

고인 물은 오래지 않아 변한다. 분명 투명했던 물이건만 흐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물때가 끼고 심한 경우 냄새까지 풍긴다. 썩고 있다는 뜻이다.

가습기에는 필연적으로 물이 고인다. 날 때부터 천식을 앓고 있는 아이를 둔 아버지의 눈엔, 고인 물이 늘 거슬렸다. 마음 같아선 모든 부품을 분해해 세척하고 싶었지만 그러자니 제품을 아예 재조립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결국 완벽하게 세척할 수 있는 가습기를 직접 만들었다. 미로 서동진 대표(44)의 이야기다. 서 대표를 만나 ‘완벽 세척 가습기’를 세상에 내놓은 과정을 들었다.

◇미로에 빠진 30대 창업자들

인하대 전자전기컴퓨터공학부 4학년 때 경진대회를 참가했던 모습. /서동진 대표 제공

1997년 인하대 전자전기컴퓨터공학부에 입학했다. 창업을 꿈꾼 건 이 무렵부터다. “조금 늦은 사춘기가 왔어요. ‘사람은 왜 살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같은 생각을 하다 보면 결론은 늘 같았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뭐 하나는 남겨야 한다는 거였죠. 다소 막연하지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정보공학전공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2010년 여름 박사과정을 마치고 창업에 첫발을 뗐다. 전공을 살려 산업용 제어기를 만드는 회사 ‘노바레보’를 설립했다. “제어기 안에 들어가는 회로기판을 얼마나 정교하게 만드느냐가 관건이었어요. 어린이 전동차에 들어가는 스마트 컨트롤러를 만들면서부터 조금씩 매출이 올랐죠.”

창업 3년 차였던 2012년 인하대 창업보육센터에 입주한 스타트업 대표들과 스터디모임을 꾸렸다. 모임 이름이 ‘미로’였다. 미로에 빠진 사람들이 미로를 벗어나 아름다운 길(美路)를 걸어보자는 뜻이다.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만나서 사업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게 어느 순간부터 정례화됐어요. 각자 5분 정도 지난 한 달간 잘했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얘기했고 서로 응원을 하거나 조언을 나눴습니다.”

2014년에 참가했던 가전제품 박람회. 일본(왼쪽), 홍콩(오른쪽)에서 총 2000여대의 가습기 수출 계약을 따냈다. /서동진 대표 제공

그렇게 7개월이 지나자 스터디원끼리 삼삼오오 모여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저 역시 오용주·김민석 대표와 머리를 맞댔습니다. 오 대표는 LED조명 관련 회사를, 김 대표는 바이오 제품 수출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각자 새로운 아이템을 하나씩 발굴해 해외 전시회를 가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마치 공모전을 준비하는 대학생이 된 기분이었죠.”

어떤 아이템이 좋을까 고민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골머리를 앓고 있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갓 태어난 둘째 아이가 천식이 있어서 가습기를 매일 사용했어요. 가습기 살균제 논란이 한바탕 휩쓴 이후였는데 기기 내부에 물이 닿는 모든 곳을 청소하고 싶어도 도무지 방법이 없더군요. 물컵처럼 모든 부분에 손이 닿는, 그릇처럼 뽀득뽀득 닦을 수 있는 가습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완벽하게 세척할 수 있는 가습기 개발에 돌입했습니다.”

2014년 일본의 한 가전제품 박람회에 참가했다. “한 부스에 세 대표의 제품 목업(실물 모형)을 올려뒀는데요. 가습기 앞에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이어진 홍콩 전시회에서도 마찬가지였죠. 막판엔 저보다 두 사람이 더 열성적으로 가습기를 홍보하더니 결국 일본과 독일로 총 2000여대의 가습기 수출 계약을 따냈습니다. 원가 계산에 오류가 있어서 수출해도 적자인 상황이었지만, 그 계약금 덕분에 가습기 양산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어요.”

◇10억원을 잃고 얻은 교훈

2014년 11월 특허발명대전에 참가해 금상을 받았다. /서동진 대표 제공

2014년 6월 3일 세 사람은 공동대표로 주식회사 미로(miro) 법인을 세웠다. 동일한 지분을 갖고 동일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가족을 포함한 지인들 모두가 세 사람을 말렸다. 동업은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세 공동대표는 한 장짜리 계약서로 합의를 마쳤다. 새로운 사람을 뽑거나 직원을 내보내야 하는 상황엔 만장일치, 그 외의 경우엔 다수결에 따른다는 원칙 하나면 충분했다.

2015년 SBS 창업 예능 토크쇼 ‘창업스타’에 출연했다. /서동진 대표 제공

- 각자 어떤 역할을 맡고 있나요.

“전 연구개발을 맡았고 오 대표는 국내영업과 생산관리, 김 대표는 해외 수출·영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 주간 회의 자리에서 모든 업무의 진행 상황을 공유해요. 부부처럼 모든 게 묶여있습니다. ‘공동대표’이기 때문에 서류에 도장을 찍을 때 세 명의 직인이 모두 있어야 법적인 효력을 가질 수 있죠. 은행에 대출받으러 갈 때도 늘 셋이 함께 다녔습니다.”

- 완벽 세척 가습기 개발은 무엇이 관건이었나요.

“소형 팬이 가장 문제였어요. 선풍기, 헤어드라이어 등 팬이 있는 곳엔 늘 먼지가 쌓입니다. 가습기에는 물방울을 멀리 퍼뜨리기 위해 소형 팬이 있는데요. 방수가 되는 큰 팬은 많은데 작은 팬은 없더군요. 어쩔 수 없이 500번 넘는 실험 끝에 직접 만들었죠. 팬을 포함한 본체 부품을 모두 분리해 설거지하듯 주방 세제로 박박 닦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화재로 소실된 공장 모습.(왼쪽) 화재 후 4일만에 다른 공장을 찾아 재생산에 돌입했다.(오른쪽) /서동진 대표 제공

- 사업 초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있나요.

“2016년 남동공단에 난 화재로 10억여 원의 손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보상 문제로 법정까지 갔지만 원하는 보상을 받을 순 없었죠. 대신 인천테크노파크·지식재산센터·디자인지원센터 등 유관기관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덕분에 화재 4일 만에 다른 공장에서 재생산에 돌입할 수 있었죠. 배운 것도 많아요. 과거엔 생산 공장과 계약을 맺을 때 화재 보험 가입 여부를 구두로 확인하는 정도로 그쳤다면, 이젠 화재 보험 증서를 요구합니다. 그 외 전반적인 체계를 갖출 때 더 꼼꼼하게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죠.”

- 지금은 가습기를 어디에서 만드나요.

“전체 생산량 중 국내 생산 비율은 5%도 안 됩니다. 중국 70%, 베트남 30% 정도로 생산하고 있어요. 다만 신제품을 출시할 땐 인천 남동공단에서 먼저 생산합니다. 해외 파견 인건비, 관리비 등을 계산해 봤을 때 연 생산량 3만대 이하인 제품은 국내에서 만드는 게 더 저렴하더군요. 연간 10만대 이상의 수요가 확인되면 중국·베트남 등으로 생산처를 옮깁니다.”

미로 사무실 가장 안쪽에 있는 실험실. 신제품 출시를 앞둘 때나 소비자에게 문의사항이 들어올 때마다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두고 실험한다. /더비비드

-- 위탁 생산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요.

“대량생산을 하기에 위탁생산(OEM)만큼 합리적인 시스템은 없다고 생각해요. 미로 가습기를 처음 양산할 때 남동공단 기술자분들을 보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몇십 년간 제작에 몸담은 베테랑이 있는데 그분들보다 싸고 확실하게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고 봤죠. 애플도 본사에선 제품 기획이나 디자인까지만 하고 전량 위탁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미로의 방향성도 그래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 가습기는 어떤 원리로 작동하나요.

“가습기를 검색하면 70~80%는 초음파식 가습기가 나옵니다. 초음파식 가습기에는 진동자가 있는데요. 240만㎐ 즉 1초에 240만번 흔들면서 물을 치면 수면에서 물방울이 튕겨 나가죠. 이때 바람을 불어주면 작은 공기 방울이 퍼져 나갑니다. 입자가 작을수록 빨리 증발하니 습도도 빨리 올라가죠. 초음파식 가습기에 미지근한 물을 넣으면 더 빠른 속도로 습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미로 가습기는 부품을 분리해 완벽하게 세척할 수 있다. 물을 담아두는 통 외에도 주입구, 미니팬까지 손이 닿는다. /더비비드

- 초음파식 외에도 가열식·기화식 등 종류가 많은데 어떻게 선택해야 하나요.

“가열식은 냄비에 물을 끓일 때 나오는 수증기와 같은 원리예요. 하루에 8~10시간 틀면 한 달 전기요금이 5만원을 넘죠. 그래서 단열이 부족하거나 외풍이 심한 집이 아니라면 권하지 않습니다. 기화식은 습도가 높을 땐 증발이 잘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어요. 이를 포화 가습이라고 하는데요. 초음파식은 포화 가습이 되면서 전기 에너지를 적게 쓴다는 점 때문에 가장 많이 쓰이죠. 초음파식·가열식을 동시에 적용한 복합식도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물이 닿는 모든 부품을 분리해 세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죠.”

- 완벽 세척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물컵에 담긴 물은 하루만 지나면 안 마시고 버려요. 그리고 그 물컵은 꼭 헹군 다음 다시 물을 담습니다. 마시는 물은 식도를 타고 소화기관으로 들어가죠. 가습기로 나오는 물은 호흡기로 들어옵니다. 똑같이 몸에 들어오는 건데 가습기의 물은 며칠, 길게는 몇 주를 그냥 담아놔요. 세척하고 싶어도 소형 팬 등 내부까지 손이 닿지 않도록 설계한 가습기가 대부분이죠. 호흡기 건강을 지키기 위해 가습기를 사용했다가 고인 물에서 세균이 번식하면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신생아·노인 등 면역력이 약한 사람일수록 완벽하게 세척할 수 있는 가습기를 사용하는 게 중요한 이유죠.”

◇고인 물 없애려다 고인 물이 된 사연

완벽 세척 가습기 개발한 미로 서동진 대표. /더비비드

완벽 세척이 가능한 가습기는 금세 입소문을 탔다. 특히 어린 아이를 둔 엄마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창업 첫해인 2014년 매출 26억원을 달성했다. 이듬해에는 52억원, 2020년엔 200억원을 돌파했다. “몇년 전부터 IoT(사물인터넷) 시장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미로의 모든 제품에 IoT 시스템을 위해 무선랜 카드를 넣는 슬롯을 마련했어요. 스마트폰으로 전원을 켰다 끄는 건 물론이고 요일별 시간대별 예약 설정도 가능합니다.”

최근엔 ‘고인 물’을 한 분야에 오래 몸담고 있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기도 한다. “가습기 고인물을 없애려다 가습기 ‘고인 물’이 됐네요. 하지만 정체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늘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어요. 아이의 호흡기 건강을 위해 완벽 세척 가습기를 고안했던 것처럼, 아이가 먹고 입고 자는 등 일상을 안심하고 누리는 데 도움을 주는 제품을 만들고 싶어요. 20년이고 30년이고, 멈추지 않고 흘러갈 겁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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