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4월이 제철인 귤, 늦게 시작했지만 달달한 내 인생 같아"

더 비비드 2024. 6. 26. 16:41
카라향 농부의 인생과 농사 이야기

서귀포 대천동에 위치한 홍동표 농부님의 카라향 농가. /더비비드

4월 17일 찾아간 제주도 서귀포시 대천동에 귤밭. 규모 4958㎡(1500평) 귤밭에는 4월 중순이 넘었는데도 주황빛 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새순의 초록빛으로 물든 제주도에 주황빛 열매가 어우러져 지상낙원 같은 풍경이었다.​

‘귤은 겨울에 수확하는 작물’이라는 편견을 깬 귤의 정체는 카라향. 남진해라고도 부르는 카라향은 2009년 농업기술원을 통해 제주도에 처음 알려진 만감류다. 제대로 재배하기 시작한 지는 5년도 채 안 된 신품종이다.

​홍동표(65) 중문농협 카라향 공동선별출하회(이하 공선회) 회장은 5년 전 천혜향을 기르던 밭의 3분의 1을 과감히 정리하고 카라향 묘목을 새로 심었다. 지금은 평당 15~20kg의 카라향을 수확하는 알짜 밭이 됐지만, 그가 도전하던 때만 해도 카라향에 대한 정보나 재배법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시기였다. 홍 회장을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와 카라향 농사 도전기를 들었다.​

◇’귤 천지’ 제주도에서도 귀한 봄귤, 카라향

카라향을 잘라본 모습. 과즙이 풍부하다. /더비비드

카라향은 카라만다린과 길포 폰칸이라는 귤이 교배된 품종이다. 수확 시기가 늦은 귤을 총칭하는 만감류의 일종이다. 생김새는 일반 감귤보다 조금 크고, 과피가 울퉁불퉁한데 부드러워 귤처럼 쉽게 벗겨 먹을 수 있다. 한라봉, 천혜향 등 다른 만감류보다 당도가 높고 과즙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평균 당도가 15브릭스 이상이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카라향의 유래가 흥미롭다. 카라향은 다른 만감류의 수확시기인 1~2월에 따면 산도가 매우 높아 못 먹을 정도다. 간혹가다 씹히는 씨앗, 울퉁불퉁한 외양에 눈이 저절로 감기는 신맛까지. 상품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열매를 따지 않고 그대로 둬 나무에 달린 채 봄이 되자, 새들이 와서 열매를 먹기 시작했다는 것. 달콤한 과실은 귀신같이 아는 새들이 이걸 먹는 모습을 수상하게 여긴 농부들이 혹시나 싶어 열매를 맛보니 아니나 다를까, 맛이 제대로 들었다고 한다.​

제주도 농부들은 뒤늦게 알게 된 카라향을 열심히 기르고 있다. 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재배를 시작해 제주도에서 약 2600톤의 카라향이 농협을 통해 유통·생산되고 있다. 연 40만~60만톤(t)의 귤이 생산되는 제주도에서도 귀한 작물이다. 그중 서귀포시 중문동 일대에서 350톤의 카라향이 생산된다.​

◇28살에 바나나·파인애플로 농사 입문

홍동표 농부. 서귀포 카라향 공선출하회 회장이다. /더비비드

1958년생 홍 회장은 강정초등학교·중문중학교·서귀포농업고등학교(현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 출신의 서귀포 토박이다. 벼농사를 하시던 부모님의 업을 이어받아 40년 가까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300평으로 시작해 다양한 작물을 기르며 1500평으로 규모를 키웠다.​

-농업에 뛰어들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부모님의 벼농사를 도우며 자랐어요. 대학 갈 형편이 안 돼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농사가 힘든 걸 알아 다른 일을 하고 싶었죠. 제대 후 서귀포 시내에서 인테리어업을 했습니다. 당시 제주도에 아파트가 들어서던 때라 장판 시공사업을 했었죠. 전문 기술이 없으니 사람을 고용해야 했고, 시행착오가 많아서 잘 안됐어요. 27살까지 하다 사업을 접고 농사에 입문했죠.”

(왼쪽부터) 직접 기른 카라향을 바라보는 홍 회장과 즉석에서 과피를 벗겨내본 카라향의 모습. /더비비드

-처음 길렀던 작물은 뭔가요.​

“1980년대 제주도에는 열대과일 붐이 일었어요. 비싸게 팔리는 작물이라는 말에 부모님께 물려받은 땅 300평에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심어보기로 했죠. 열대작물을 기르려면 비닐하우스를 설치해야 했습니다. 운 좋게 1981년 농업기술원의 농어민 후계자 1기로 선정돼 400만원을 저리로 빌렸습니다. 인건비를 줄이려 직접 철근과 비닐 가림막을 사다 시설을 꾸렸죠.”

울퉁불퉁한 과피가 매력적인 카라향의 모습. /더비비드

-귤 농사는 언제부터 하셨어요.

​“1996년부터요. 바나나와 파인애플이 국내로 값싸게 수입되면서 제주도 열대작물 농업이 몰락했거든요. 저도 당시 5000만원의 빚을 졌습니다. 새로운 작물에 도전한 건 생존 때문이었어요. 재배법을 배우는 재미도 있지만, 신품종일수록 구매 수요가 많아 상품 가치도 높게 평가받을 수 있거든요. 하우스 감귤 농사 10년으로 빚을 갚고, 이후 한라봉을 10년 재배하고 6년 전 카라향과 천혜향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카라향 재배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귤 농부에게 4~5월은 보릿고개입니다. 겨울에는 노지감귤과 만감류를 수확하고, 여름에는 하우스 감귤을 수확할 수 있지만 4~5월에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이 없었거든요. 이때 수확할 수 있는 귤은 카라향뿐입니다.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농부들 사이에선 카라향이 ‘효자 귤’로 불려요.”

(왼쪽부터)카라향 재배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홍 농부님의 모습과 농가에서 직접 당도를 측정하는 모습. /더비비드

-작물을 바꿀 때마다 묘목을 새로 사고, 밭을 정비하는데 큰돈이 드는 것 아닌가요.​

“투자금이 들긴 하지만 소비자들의 입맛은 빠르게 변해요. 과거엔 감귤만 먹다가 요즘에는 천혜향, 레드향, 카라향과 같은 만감류가 인기인 것처럼요. 농업도 도전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그렇다고 이전에 기르던 나무를 한 번에 모두 뽑아내는 건 아닙니다. 신품종 묘목을 사다가 100평, 200평, 300평 이렇게 면적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실험해 보는 거죠."​

-제주도에선 어떤 귤을 심어도 쑥쑥 잘 자라나 봐요.​

“품종마다 재배법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제주의 토질과 기후 특성이 귤에 적합한 건 맞아요. 제주 토양은 검고 푸석한 화산회토가 약 80%를 차지하는데요. 화산재가 퇴적하면서 생긴 땅으로 통기성과 배수성이 좋죠. 아시아 동남부, 인도 등 따뜻한 지역 출신인 귤은 일조량이 많고, 일교차가 작으며 배수가 잘되는 땅에서 잘 자랍니다. 북서풍의 영향을 덜 받아 한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포근한 제주도가 우리나라에서는 귤을 재배하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혼자서 1500평 귤밭 다 관리할 수 있는 비법 공개

(왼쪽부터)카라향은 수확 전에 꽃을 피우는 작물이다. 카라향 꽃의 모습. /더비비드

한 작물을 수확하기까지의 생육 기간을 ‘작기’라고 하는데, 카라향의 1작기는 365~400일이다. 만감류 중에서 가장 길다. 그만큼 농부의 정성도 오래 들어간다.​

-카라향 재배 과정이 궁금합니다.​

“수확시기인 4~5월에 꽃도 같이 핍니다. 수확과 동시에 다음 해 농사를 시작하는 거죠. 먼저 ‘전정 작업’을 해야 합니다. 가지치기죠. 지난해 수확한 가지가 아닌 반대쪽 가지로 방향을 바꿔주는 것이 관건입니다. 이미 열매를 수확한 가지의 꽃은 솎아내거나 가지 자체를 쳐내고, 지난해 열매를 많이 피우지 않은 부분의 꽃과 가지는 최대한 살립니다. 나무에서 매년 새로운 가지에 열매가 달리게 해 나무 수명을 늘리는 거죠. 7~8월엔 ‘적과’ 작업을 합니다. 한 나무에 열매가 너무 많이 달리면 과실의 크기가 전반적으로 작아지고 땅에 가까운 쪽은 햇빛을 잘 받지 못하거든요. 적당량만 남기고 인위적으로 열매를 떨어뜨리는 거죠. 이후에는 관수 작업만 하면 됩니다. 평균 주 1회씩 물을 주면 되는데, 카라향은 작기가 길어 물을 많이 먹습니다. 한라봉은 수확 직전 물 공급을 멈춰 당도를 높이는데, 카라향은 수확 직전까지 물을 주면서 산도를 낮춰요.”

열매가 무거워지면 끈으로 천장에 매달아 가지가 늘어지는 것을 막는다. /더비비드

-요즘 농부님의 하루 일과는 어떤가요.​

“1500평 정도는 저 혼자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간 정도 작업하면 됩니다. 열매가 무거워 늘어지는 가지는 끈으로 묶어주고, 나무에 병충해가 들진 않았는지 보살피죠. 땅에 주기적으로 미생물 비료도 뿌리고요. 수확시기에는 일이 많으니 품앗이를 통해 귤을 수확합니다. 수확은 한 번에 하지 않고, 한 달에 걸쳐 농협에서 요구하는 입고량에 따라 수확합니다. 공선회 회원들과 수확시기를 조절하죠. 밭마다 열매의 당도가 조금씩 달라 당산도 측정기로 수시로 카라향의 상태를 공유하며 수확해요.”

귤을 수확할 때에는 과피의 손상을 막기 위해 꼭지를 최대한 뭉툭하게 다듬는다. /더비비드

-1500평 밭을 혼자 관리하신다고요. 농부님만의 귤 재배 노하우가 있나요.​

“재배 역사가 짧아 카라향 재배에 교과서적인 방법이 있는 건 아닌데요. 저는 전정 작업보다 적과 작업에 더 심혈을 기울입니다. 이렇게 하면 ‘자연 적과’ 현상을 이용할 수 있더군요. 꽃을 많이 남겨 열매가 많이 달리면, 나무가 빨리 무거워져 제가 건드리지 않아도 나무가 알아서 열매를 조금씩 떨어뜨립니다. 나무가 스스로 적과한 뒤 제가 개입해 열매를 솎아내죠. 자연의 섭리를 활용해 일손을 더는 방법입니다.”​

◇농부 사랑 꽉 채운 맛있는 서귀포 카라향의 중간 경유지

중문감귤거점산지유통센터의 만감류 전용 선별장의 모습. 중문농협은 각 농가에 무료로 컨테이너를 대여한다. /더비비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귤의 90%는 제주산이다. 해거리(과실 수량이 많았던 해의 이듬해에 나무가 약해서 수량이 현저히 줄어드는 현상) 때문에 편차가 크지만, 1년에 약 40만~60만톤의 귤이 생산된다.​

그중에서도 제주 서귀포시 중문동·대천동·예래동 지역에서 난 귤들은 대부분 중문농협 소속 ‘중문감귤거점산지유통센터’로 입고된다. 도내 농협 중에서도 귤 처리 물량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 1년에 평균 1만톤, 480억원어치의 귤이 이곳을 거친다.​

1만톤의 귤 중 만감류가 차지하는 비중은 25%(2500톤) 정도. 만감류 중에서도 카라향은 연간 유통량이 350톤에 불과한 희소 작물이다.

홍동표 회장님의 농가에서 즉석으로 카라향의 당도를 측정한 모습. 각각 16.5, 15.9브릭스가 나왔다. /더비비드

-카라향의 품질 기준이 따로 있나요.​

“다른 만감류와 동일하게 당도는 12브릭스 이상, 산도는 1% 이하면 수확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제주 카라향은 이 기준을 훨씬 상회합니다. 수확시기에 임박해 당도를 확인해 보면 최소 15에서 높게는 17브릭스까지 나오죠.”

카라향은 예조 후 저온 창고에 보관했다가 선별 작업 후 출하한다. /더비비드

-수확 이후 카라향의 경로가 궁금합니다.​

“중문농협에서 20kg짜리 컨테이너 박스를 농가에 무료로 빌려줍니다. 컨테이너를 채워 농협에 입고하면, 중문감귤거점산지유통센터에서 2~3일 동안 예조 기간을 거칩니다. 과피에 있는 수분기를 날려 저장성을 올리고, 남아있는 산도는 낮추는 기간이죠. 이후 10~15도 사이로 유지되는 저온 창고에서 보관하다가, 주문량에 맞춰 선별 포장 작업을 거친 후 전국 각지로 배송됩니다.”​

-카라향을 저장했다가 출하 직전 선별하는 이유가 있나요.​

“카라향은 과피가 연해 구르거나 날카로운 꼭지에 긁히는 것만으로도 알맹이가 물러집니다. 밭에서 딸때도 꼭지를 최대한 짧고 뭉툭하게 잘라내는 이유죠. 선별기를 지나려면 어쩔 수 없이 귤이 구르게 되니까, 출하 시기와 가깝게 선별 작업을 하는 겁니다.”

과피가 물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수 선별기에 넣고 포장하는 모습. /더비비드

-카라향의 선별 포장 기준은요.​

“중문농협에서는 카라향을 5~27과(과: 3kg에 감귤이 들어가는 개수)로 구분합니다.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선별기에 올릴 때도 손수 한 알씩 기계로 올리죠. 선별기에는 비파괴 당도 측정기(대상물을 파괴하지 않고 레이저를 이용해 당도를 측정하는 기기)가 장착돼 있어 품질 기준에 맞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합니다. 상급품 과실은 18~22과에 속하는데요. 이 제품들은 주로 백화점이나 소규모 온라인 유통업체로 보내져요.”​

◇맛있는 귤, 당도보다 중요한 기준은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세월 좋은 친구'로 불린다는 홍 회장. /더비비드

홍 회장은 친구들 사이에서 ‘요즘 가장 세월 좋은 친구’로 불린다. 불확실한 청년기를 보냈지만 귤 농사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면서 높은 고정 수익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연 매출이 궁금합니다.​

“카라향 중에서 상급품은 농협에서 1kg에 5000원 정도의 값으로 받아 가요. 밭에서는 1평당 15~20kg의 귤이 수확됩니다. 500평 기준 약 3000만~4000만원의 수익이 나고, 연간 경영비는 1000만원 정도입니다. 순이익이 2000만~3000만원 정도 나는 거죠. 천혜향 밭까지 모두 합하면 평균 6000만원 정도의 순이익을 내고 있습니다. 전부 제가 가져가진 못합니다. 수익이 나면 또 신품종을 심어보거나. 땅을 더 사서 규모를 키워야 하죠.”

빛깔이 진하고 과즙이 풍부한 것이 카라향의 특징이다. /더비비드

-맛있는 카라향 고르는 법이 따로 있나요.​

“다들 당도만 중요하게 여기는데요. 더 중요한 건 ‘감미비’입니다. 감미비란 과실의 당도를 산도로 나눈 값인데요. 당도가 아무리 높아도 산도까지 높으면 달콤한 맛이 느껴지지 않아요. 예를 들어 당도가 12브릭스여도 산도가 1.2%라면 감미비는 12/1.2이니 10도에 불과한 거죠. 감미비까지 12도 이상으로 나오는 카라향이 정말 달고 맛있습니다.”

​-농부님에게 카라향이란 무엇인가요.​

“힘들었던 청년기를 보상해 주는 감사한 작물입니다. 물값도 많이 들고, 한그루씩 모두 꼼꼼히 보살펴 줘야 하지만 카라향으로 봄에 작물을 수확하는 재미도 느끼고, 새로운 수익원을 얻게 됐으니까요. 사심이 들어간 건지는 몰라도, 저는 만감류 중에 카라향이 제일 맛있어요.”​

/김영리 에디터